50년의 무언극, 50년의 도전, 그리고 50년의 시선
50년의 무언극, 50년의 도전, 그리고 50년의 시선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3.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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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송번수-50년의 무언극' 전

판화, 타피스트리, 종이부조, 환경부조물 등 50여년간 도전을 멈추지 않은 현대미술작가 송번수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이 전시회의 제목은 <50년의 무언극>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은 그의 생애, 그의 예술 인생을 함축적으로 모아 놓은 이 전시는 우리가 잘 몰랐던 '송번수'라는 작가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엿보게 만든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소년. 하지만 집안에서는 '환쟁이는 밥 굶는다'며 소년을 억지로 상업고등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그 상고에 미술을 전공한 선생님이 오면서 소년은 미술의 꿈을 키워갔다. 자신의 집에서 직접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이제 50년이 넘었고 소년은 백발의 작가가 됐다. 

▲ 송번수 작가와 그의 대표작 <미완의 면류관>

그의 미술세계는 한마디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주제에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바로바로 작품으로 남겼다. 유신의 그림자가 온 나라를 덮었던 70년대, 그는 오색으로 방독면을 쓴 사람을 다양하게 표현한 <공습경보>라는 판화를 남긴다. "당시 사회 자체가 공습경보"라는 게 이 작품의 의도였다.

'남북간통일원칙합의' 7.4 남북공동선언을 알리는 신문 호외를 400장의 판화로 제작해 뿌리는 퍼포먼스를 했던 판화작품이 먼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듯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보면서 관람이 시작된다. 그의 주요 판화작품과 함께 '가시'를 소재로 한 판화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실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는 송번수가 판화를 통해 전하려는 7,80년대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 공습경보, 1974, 세리그라피, 150×150㎝

가시는 날카롭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 있는 가시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억압된 당시의 세상을 그는 '가시'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 가시는 땅을 뚫고 솟아난다. 한 시대가 저물면 민중의 용솟음이 일어난다. 그 마음이 담겨있는 판화들을 돌아보고 나면 이제 타피스트리 작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1977년 파리 유학 중에 만났다는 타피스트리는 실 작업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회화 작품이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실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이으며 여기에 명암과 색감까지 표시하는 작가의 철저한 꼼꼼함에 놀라게 된다.

그는 이 타피스트리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표현하고 이라크의 자살 폭탄 테러 참극을 표현하고 '상대성 원리'의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수십년을 이어온 세세함의 진수가 그의 타피스트리 작품 속에 모두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이라크에서 온 편지, 2006, 아크릴사, 평직, 229×277cm

그리고 이제 <미완의 면류관>을 만날 차레다. 이 타피스트리는 경기도 광주 능평성당에 설치되어 있고 국내에서 제단 벽에 설치된 유일무이한 타피스트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이 작품을 "섬유미술과 종교미술, 공예와 회화가 어우러진 최고의 접점이자. 각 분야의 지평을 열어준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목은 <미완의 면류관>이다. 완성되지 않은 면류관. 송번수는 관객이 이 면류관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무엇인가를 느낀다면 그것이 완성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썼던 가시 면류관, 그 뒤에 비치는 그림자. 그리고 빛.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견디며 우리의 죄를 대속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풍모가 느껴지고 있었다.

▲ 미완의 면류관, 2002-2003, 모사, 평직, 302×298㎝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송번수의 '면류관' 시리즈는 바로 이 구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그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 편의 멋진 무언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억압받은 사회 속에서 다양한 표현을 하려 했고 전쟁과 재앙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예수의 면류관이 존재하기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이 한 편의 무언극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50년의 무언극, 50년의 도전, 50년의 시선. 송번수가 주는 '50년'은 우리에게 묘한 묵직함을 준다. 오는 6월 18일까지 그 묵직함을 간직한 송번수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