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종상 화백] 독도진경과 그날의 해돋이(2)
[특별기고-이종상 화백] 독도진경과 그날의 해돋이(2)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7.03.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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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랑 이종상 화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철학박사 / 서울대학교 초대 미술관장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민간인으로 혼자서 울릉경찰서 경비정으로 갈아탔을 때부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배는 처음으로 독도에 해양경찰이 주둔(駐屯)하기 위한 중요 장비가 가득 실려 있다고 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엔 별들만 보이는데 새벽바다를 가르는 스크류의 포말(泡沫)을 따라 오징어 떼들이 소용돌이치는 물살 속에서 반딧부리처럼 발광(發光)하며 포물선을 긋다가 사라진다.  가장 먼저 해뜨는  땅, 독도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울렁거리고 물보라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른 채 추운 갑판 위에서 뱃머리를 응시한다. 

내가 독도를 최초로 화폭에 담는다는 이 감격. 선하나, 획 하나에서 분명, 독도가 내 산하임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 확신. 신은 정녕 독도를 끝으로 이 조국의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완성했으리라.  

뭍을 떠난 지 6시간쯤 지났을까.  보라 빛 새벽 물안개 속에서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드러나는 섬 그림자 하나가 멀리서 나타났다. 다가갈수록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모습으로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저것이 바로 우리 땅 독도로구나. 아! 이 장쾌(壯快)하고도 의젓  함이여! 환희(歡喜)와 열락(悅樂)!. 독도는 바로 지금 이렇게 내 앞에 다가오고 있다. 

어둠을 뚫고 새벽 물안개를 속에서 드러난 섬 그림자가 한 개인가 싶더니 둘로 서서히 갈라지면서 마치 청룡(靑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듯이 섬과 섬 사이에서 갑작이 이글거리는  아침 해가 눈부시게 솟아오른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壯觀)이다. 

이로서, 나는 우리 땅 동쪽 바다 끝, 독도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를 보았다. 아름다운 내 조국의 산하여. 눈부신 해오름이여. 찬란한 아침햇살을 비껴 받아 붉게 물든 독섬의 서슬을 보라. 저 위대한 신의 창작물을 보라.  누구의 넘봄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파도를 딛고 버티어 선 저 자랑스러운 독도의 위용을 보라. 그리고 너의 그 끈질긴 인내(忍耐)와 침묵(沈黙)의 뜻을 이제 나에게 다오.. 

쾅쾅 가슴을 치는 이 흥분. 걷잡을 수 없는 감격에 미친 듯이 먹을 갈아 화선지에 담아 본다. 지금 여기는 민간자원수비대(民間自願守備隊)들이 지키고 있다. 보름마다 교대를 하고 있는데 지붕에서 받아 모은 빗물로 식수를 하기 때문에 섬에서 오래 있으면 구륵병이 생기므로 교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큰 배를 접안시킬만한 시설이 없으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암초를 피해 조심스레 동도(東島)로 접근해간다.   

아직도 보라색 물안개가 가파른 섬 허리를 두르고 있다.  지금 막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용광로에서 흘러내린 듯한 기암절벽(寄岩絶壁)의 독도.  급한 마음 에 타고 가던 거릇배에서 훌쩍 물속으로 뛰어들어 독도에 첫발을 내 디뎠다. 그리고는 급히 한줌의 흙을 떠서 냄새를 맡아본다. 갯비린내 나는 구수한 흙 내음. 내 어릴적 뛰놀던 갯마을의 흙 내음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렇게 나는 독도를 밟았다. 그림으로 내 품에 꼭 안고 싶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아슬아슬한 절벽을 타고 동도(東島) 정상에 오르니 해가 중천에 솟았 다. 10명 남짓한 수비대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하늘을 찌르며 의연히 나부끼는  자랑스런 태극기 아래서 그들과 어울려 준비해간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배고팠던 참에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그림 그릴 장소를 찾아 나섰다. 어느 곳, 한 군데,
편안히 발붙이고 앉아 그림 그릴 곳이 없으니 난감(難堪)한 일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항아리에 받아두었던 빗물로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골기(骨氣)가 살아있어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부벽준(斧劈皴)의 암벽으로 둘러쳐진 절경(絶景)이다. 

독도의 산천이 이리도 아름다웠더란 말인가. 동도가 수줍어 엎드렸는데 서도가 고개 들고 망을 보는 자세다. 이 천애(天涯)의 벼랑 위에 짝지어 알을 품는 갈매기 떼들. 태고의 정적 속에서 해풍에 휘날리는 태극기 소리, 그리고 갈매기 소리 와 파도소리만이 천공(天空)을 메운다. 이따금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어선 몇 척이 한가로이 부유(浮游)하고 은빛 파도는 3월의 태양 아래 파편(破片)처럼 부서져 나간다.

신들린 사람처럼 화선지 위에 그려댄다. 그리고 또 그려도 이 벅찬 가슴은 후련하지 않다. 담묵(淡墨)으로도 그려보고 초묵(焦墨)으로도 그려본다. 그래도 가슴만 터질 뿐, 독도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독도의 흙이라도 발라 봐야지. 그 흙 그림 속에서 비로소 독도의 진경이 보이는 듯 하다. 나는  경건(敬虔)한 자세로 ‘그림과 자연이 어우러짐’을 본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서도(西島)의 어깨너머로 기운다. 황혼에 물든 독도는  수줍은 듯 더욱 아름다운 물그림자를 쪽빛 바다 위에 길게 드리운다. 

억겁(億劫)의 세월을 인고(忍苦)로 침묵(沈黙)해 오면서 파도와 나눈 은밀한 대화가 들린다. 누가 그 이름을 독섬이라 불러주었던가. 

깍아 세운 듯한 서슬 퍼런 능선(稜線). 그 험하고 가파른 벼랑은 발붙일 곳조차 없건 만은 마음만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누운 듯이 아늑하다. 

이제는 너의 곁을 떠나야한다.  쪽빛 바다,  은백의 파도,  검붉은 바위, 비취색(翡翠色) 풀잎, 하얀 갈매기 무리를 두고 떠나야한다. 영원히 너에게 안주(安住)하고픈 이 기막힌 감회(感懷)를 가슴 가득히 안고. 멀리 석양에 물든 구름이 너의 머리 위에 머무는 것을 보면서. 흰 포말이 너의 몸을 아프게 때리며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수평선 위로 통통배가 길게 연기를 뿜으며 미끄러져 가는 것을 보면서. 동도 정상에 나부끼는 태극기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니 나는 행복하다. 

너를 믿음직한 해양경찰 수비대에 맡겨 두는 것이.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항상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 내가 그린 독도진경이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 

화선지가 찢어지도록 먹물을 끼얹었던 그 붓을 다시 들고, 네가 준 인내와  침묵의 참 뜻을 보기 위해 다시 찾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