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구하 화가“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남는다. 그것이 ‘흔적'”
[인터뷰] 이구하 화가“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남는다. 그것이 ‘흔적'”
  •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3.3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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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상 수상,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 갖게 해... 새로운 매체로 선보이고파”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남는다. 그것이 ‘흔적’이다” 

‘흔적’의 개념을 먹으로 거북이 모양을 통해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구하. 그는 서양화가지만 캔버스에 먹으로 ‘흔적’(Patina)을 표현하고 있다. 색을 쓰면 더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솔직한 생각은 아니기에, 남에게 솔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의 작품관이 곧 그의 성격이기도 했다.

지난 1월 본지는 그에게 ‘젊은 예술가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을 계기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다양하면서도 색다른 전시로 작품 세계를 펼쳐간 ‘젊은 예술가’ 이구하의 솔직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 이구하 화가

서울문화투데이 젊은 예술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자가 된 이후 소회는?

20대 초중반에나 상을 받았지 지금 보면 상받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누구에게 상을 줄까 이야기하는 입장인데 상을 받았다. 그것도 '젊은 예술가상'이다. 젊은 작가라니. 대상보다 더 기분이 좋더라(웃음).

상을 받으면서 처음 입선했던 때도 생각나고 옛 생각이 많이 들면서 '뭔가를 다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신문사에서 준 상인만큼 내가 잘못되면 신문사가 망신당한다는 책임감도 들고(웃음).

상이 정말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 같다. 뭔가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작가라니까(웃음) 이전보다 더 도전적으로 나아가야할 것 같다. 다음 전시는 그림이 아닌 조각이나 도자기, 미디어 등으로 지금의 '흔적' 개념을 완전히 다른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전시를 하고 싶다.

'거기서 전시가 가능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특이한 장소에서 특이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 여름철 백사장이나 다리 밑 같은 곳에서.

지난 2월에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 작품의 반 정도가 지난해 작품을 다시 그려서 걸은 것이다. 더 지우고 더 칠해서 리부트했다. 작년 그림은 없어진거다. 신작이 아닌데도 신작인 그런 느낌이다.

전시를 할 때마다 매년 신작을 걸었다. 한 작품을 열번, 스무번 거는 게 싫어서 10편 중 8,9편은 신작을 그렸는데 이게 자꾸 쌓이고 쌓였다. 하나씩 하나씩 옛 작품을 꺼내보니 뭔가를 더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때 몰랐던 부족함이 보일 때가 있지 않나. 지우고 칠하면서 나만의 밀도가 나왔는데 다른 그림과 비교할 때 깊이감이 보이긴 보였다. 재미있다. 점점 넓어지는 확장성을 가지고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놓는 것이다. 

이전에 아파트에서 '하우스 전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집주인이 제 그림을 좋아하셨는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전시를 하자고 했다. 잡다한 가구들 조금만 빼서 그림 걸 장소만 마련하면 된다고 하니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

걸기로 한 날짜가 됐는데 생각보다 가구를 많이 빼셨다. 조그만 작품으로 걸다보니 6,70개 그림이 전시됐는데 손님들이 보고 만족해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동네 사람들도 보여주자'고 하면서 정말로 전시회가 됐고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방송까지 하니까(웃음) 사람들이 다 구경을 하러 왔다. 그 집 식구들은 한 사람이라도 집을 지켜야했고 현관문도 열어놔야 했다. 직장도 못갔다고 한다(웃음). 집주인은 '그림보면서 한 잔 하자'는 동네 사람들 때문에 매일매일 술 마시고(웃음), 결국 그 분이 일괄 구매를 하셨다.

나중에 그분이 이사를 가셨는데 벽 하나는 그림을 떼지 않았다. 새로 이사온 사람에게 '이 그림 두고 갈테니 보존하겠느냐'라고 해서 약속을 받고 나서야 (집을) 팔았다고 하더라.(웃음)

특정 전시관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전시를 할 수 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전시가 가능하다. 화장실에 앉는데 내 시선에 그림이 맞추어 있다고 생각해보라(웃음). 정말 가능하다.

먹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최근 작품을 보면 칼라(색)가 드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우울한 것보다 라이트한 기분으로 볼 수 있게 등장시킨 게 칼라인데 전에도 칼라를 미묘하게 쓰기는 썼지만 자제해왔다. 칼라로 하면 일단 좋고 잘 팔리지만 약하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피카소 그림이야'라고 하지만 외국은 '피카소야'라고 한단다. 그림이 곧 나인데 칼라를 쓰면 왠지 내 생각과는 다른 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칼라로 지워낸 '흔적'을 보여주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 이구하 作/PATINA, 50x50cm, Muk on canvas, 2016

춘천에서 살면서 지역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많은 제약이 있을 것 같다

제약 많지. 특히 기득권 세력들. 자기들 기득권 내려놓기 싫어하고 새로운 것 오면 싫어하잖나. 나는 춘천이 고향이고 춘천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대학 나오면서 춘천을 떠났고 프랑스에 3년 있었지만 공부는 안하고(웃음) 귀국해서 춘천에 주소가 있지만 거의 서울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활동했다.

마음에 든다고 하면 전시하고 그랬는데 기득권들은 이런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거다. 심지어 어떤 이는 '왜 나를 안 거치고 가냐'라는 말까지 했다. 자기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거다. 이런 모습들이 참 싫다.   

'흔적'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흔적'의 철학적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단순하게 말하면 '모든 행위의 흔적'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신체에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에너지를 뿌리면서 다니는데 그것을 시각화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행동을 하게 되면 행동의 에너지, 입체적인 행동의 에너지를 보여준 것 아닌가. 그 속에 내 생각을 담고 싶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남게 되어있다. 누군가의 기억에는 분명히 내가 남아있고 지금 내가 하는 말들도 벽이나 어느 곳에 반사되어 어떤 흔적으로든 남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결과물을 남긴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을 눈에 보이게 조금 만들어놓은 거다. 

그 이야기 한번 해보자. 지금까지 25회의 개인전을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전후에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졌다는데. '전시회 징크스'라고 할 정도로(웃음)

(한참 웃은 후) 내가 첫 전시를 한 게 2001년이었는데 유학자금을 마련하려고 한 전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생각이지만 그림을 전시해서 팔면 유학자금이 생길 줄 알았다. 많이 팔리게 하려고 그림을 조그맣게 많이 그려서 싸게 팔았는데 다행히 절반 이상을 팔았다(웃음). 그 돈을 가지고 유학을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정말 말한대로 이상하게 전시회마다 일이 터졌다. 전시 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한 것부터 시작해서 춘천 전시회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는 세월호 참사가 났다. 개막 파티도 취소했다. 당시 인사말에서도 말했지만 그때는 정말 전시도 취소하고 싶었는데 갤러리 개관전이라 취소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파티를 연다는 게 참...(웃음) 이후에도 메르스에 탄핵까지 나왔으니(웃음) 이제 이 징크스가 좋게 변하길 바라야지.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유정, 꽃으로 오다' 전시를 유승현 도예가와 함께 했다. 김유정의 작품이 도예와 서양화로 표현되는 특별한 전시였는데

김유정도 저처럼 천재였고(웃음) 젊어서 돌아가신 분이었다. 그런 전시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처음이라는 것이 제일 특이했고 그를 모토로 작업하면서 도자기에 그림을 올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예전에 장난삼아 한 적은 있었지만 진지하게 임한 적은 없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고민을 많이 했다. 두 사람의 '남의 작업'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잖나. 도자기와 그림, 그리고 김유정. 이 세 사람이 융화가 되어야 나오는 것이기에 내 걸 빼면 안되는 것이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해서 아마 평생 이런 전시는 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유학 당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자가용 영업까지 하면서...

그림 공부하는 시간보다 먼 산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웃음). 처음에는 어학학교를 다녔는데 너무 지겨워서 그만두고 그 때부터 술 마시고 방황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저녁에 세느강을 지겹게 봤지(웃음). 사실 저녁에 세느강을 보면 굉장히 예쁜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걸 보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그림보다 고민이 더 많았다. 아마 지워지지 않았다면 에펠탑에 내 그림이 있을거다(웃음).

그러면서 돈이 있어야하니까 자가용 영업을 하게 됐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불법이지만(웃음) 프랑스말도 제대로 못하던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면서 그나마 돈을 만질 수 있게 됐다. 한국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진 곳에서 살아가면서 그 때 제게 생존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남은 힘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 

▲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이구하 화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기법이라는 것이 어떤 물감을 쓰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어떻게 하는 것이 기법이라고 보기에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훈련을 했다. 캔버스에 먹쓰는 사람 거의 없지 않나. 

학생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이렇게 해도 되요?" 나는 이렇게 답한다.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레포트로 써와". 세 가지 이유 다 못 댄다. 이미 학생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했는데 왜 했는지를 말하는 것을 겁내고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도전을 겁내는 거다. 이미 하고 있는데 틀리다고 할까봐 안하고 있는거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오케이를 하지 않고 일단 하라고 한다.

최근에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느낀 점이 많다고 들었다

거기서 살고 싶다(웃음). 동남아시아 자체를 처음 가봤는데 맨 처음 느낌은 정말 덥고 정말 가난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생각이 깨질 정도였다. 덥고 가난하고 빈부격차도 엄청 크고 이런 곳에 머물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둘째날 보니 아이들이 너무 순수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절을 당해도 너무 즐거워하고 표정이 밝았다. 흙장난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너무나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어준다. 내가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정도다.

정말 순수한 아이들이다. 남에게 잘보이려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점이 정말 좋았다. '이런 곳에서 살아야한다. 저들처럼 살아야하는데 나는 썩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곳도 그곳이었다. 원래는 2월 전시 끝나고 가려고 했는데 여의치가 않다. 그림 잘 팔려야 갈 수 있을텐데(웃음).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야 미술인들이 살 수 있을텐데 이런저런 문제로 미술시장이 얼어붙은 게 사실이다

내 세대에서는 안풀린다. 세대가 바뀐다해도 언제 해결될지는 모른다.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려면 그림을 사야하는데 그림을 사려면 그림을 알아야하고 그림을 알려면 장기적으로 감성적인 공부를 해야하지 않나. 정부가 백날 활성화를 시킨다고 해도 이런 토양에서는 해도 안된다. 지금 꼬마들이 제대로 교육받으면 이들이 4,50대가 됐을 때 미술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아질 것 같다.

프랑스의 경우 예술가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하고 있고 영국의 경우는 정부가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대출을 해주고 있다. 이런 노력 또한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지금은 없다. 꿈도 없다. 꿈을 가지면 욕심이 생기더라. 지금은 아무 목표나 계획없이 물흐르듯이 사는 게 좋다. ‘필요하면 연락오겠지’하며 산다(웃음). 마음을 비워야 가능성이 생기니까 큰 계획 안 세우고 살려고 한다.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