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흥보씨’ 고선웅 연출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흥보씨’ 고선웅 연출에게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7.04.2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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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놀부에게 ‘심술보’가 있었다면, 당신에겐 ‘발칙뇌(腦)’가 있는 건 아닐까요? 당신이  대본과 연출을 맡은 창극 ‘흥보씨’는 매우 발칙했습니다. 흥보 안에 부처가 있고, 흥보 안에 예수가 있었습니다. 흥보는 가난함과 배고픔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단군신화를 슬쩍 비틀어 전개를 하기도 합니다.

그간 판소리와 창극에서 ‘홍보’를 대할 때마다 늘 애처롭기보다는 답답하기만 했었죠. 그런데 고선웅에 의해서 만들어진 ‘흥보씨’는 오히려 이런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니 이해가 되더군요. 

창극 ‘흥보씨’는, 고선웅에 의해서 재창작된 창극입니다. 그 안에서 기존 판소리의 눈대목(하이라이트)은 다 들으니 좋습니다. ‘놀보심술타령’은 확대되어서 놀보와 훙보를 비교하는 노래로 심화되었더군요. 가난타령, 비단타령, 제비노정기, 박타는 대목도 사설을 좀 정리했고, 곡조도 때론 다르기도 했지만, ‘흥보가’의 연장선으로 보기엔 충분합니다. 
 
고선웅, 당신의 작품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철학이 깊진 않습니다. 비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당신은 연극 혹은 창극을 만들 때, 극본이나 연출이 철학인 면을 너무 드러내거나 깊어지면, 오히려 관객이 따라가지 못하거나 ‘거부 혹은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작품속의 철학은 마치 ‘광고 같은 철학’, ‘카피 같은 철학’입니다. 이번 ‘흥보씨’에서도 
그런 광고의 카피와도 같은 문구가 관객에게 중독성있게 전달되었습니다. “비워야 하리, 텅텅텅, 그때서야 울리리, 텅텅텅”. 앞의 ‘텅텅텅’은 가난한 흥보의 배가 텅 빈 것을 말하는 ‘의태어’입니다. 뒤의 ‘텅텅텅’은 절이나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묘사한 ‘의성어’입니다. 

원래 판소리의 텍스트에는 이렇게 의성어와 의태어를 잘 구사해서, 상황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이 많은데, 당신이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한 ‘흥보씨’에서는 이런 ‘텅텅텅’이라는 가사와 음률이 극을 본 후에도 머릿속에서 이명처럼 울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발칙한 발상이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당신의 작품에는 이렇게 ‘광고 카피’와 같은 것들이 관객을 ‘혹’하게 만들고, 때론 그것이 더 강해서 ‘훅’ 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작품을 지탱하는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창극 ‘흥보씨’는 ‘만만한’ 창극입니다. 상품광고가 소비자의 심리를 딱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창극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랬습니다. 이렇게 만만한 창극 속엔, 만만(漫漫)한 즐거움이 있다. 마치 만화(漫畵)를 보는 듯 ‘키득거리는’ 즐거움이 있죠. 게다가 여기에 판소리가 만만(滿滿)하니 이 아니 좋습니까? “그래, 이게 바로 창극이야!”하면서 보게 됩니다. 

이 창극이 매우 위대하고 발칙한 것은, 이런 만만함 속에서 ‘만만(卍卍)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매우 불교적(종교적)이고, 매우 철학적입니다. ‘보리수’와 ‘십자가’를 등장시켜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창극 ‘흥보씨’에는 석가와 예수가 있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마치 놀이처럼 배치하고 놓았습니다. 판소리와 창극에서 늘 들었던 구음(口音)도 “이제 사실 종교의 법문(Chant)이란다”라고 세뇌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발칙함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내가 강 같은 화평’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마치 부흥회에 온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흥보씨’에선 이런 모든 것들이 발칙하면서 풍자적(諷刺的)이고, 어수선하면서도 사유적(思惟的)입니다. 당신이 흥보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지금도 귓가를 울리고 있네요. “비우리 텅텅텅, 울리리 텅텅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