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2017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의 작품들
[이근수의 무용평론] 2017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의 작품들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4.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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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춤협회(손관중)가 주최하는 현대춤작가 12인전(4.4~4.9, 아르코대극장)이 31회를 맞았다.

30~40대 초반의 젊은 안무가들과 12인전이 처음인 출연자들이 8명씩 차지한 것이 올해 공연의 특색이다.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이 각각 4명씩 분포되어 모두 12개의 20분 작품이 2회씩 공연되었다. 첫 번째 순서의 공연 작품이 ‘각시’(김보라), ‘만기’(萬機, 정명훈), ‘Middle of nowhere'(고현정), ‘Dialogue in the dark’(박종현)다.  

‘Middle of nowhere'(4.4~5)는 고현정의 2017년 신작 발레다. 무릎 높이까지만 걷어 올린 커튼 안쪽에서 여인들의 발놀림이 현란하다. ‘호텔 부다페스트’ 영화의 주제곡이 경쾌하게 흐르며 여행을 준비하는 여인들의 조바심을 예고해준다.

커튼이 오르면 날렵한 군무가 펼쳐진다. 손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하나씩 든 여인들이 등장한다. 가방을 열고 옷을 갈아입는다. 뒷면 스크린엔 울창한 숲길이 확대되어 다가온다. 공작새 깃털처럼 넓게 펼쳐지는 화려한 색감의 옷은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여인의 다채로운 꿈이다. 긴 옷이 그녀를 잡아당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세상의 제약일 것이다. 밝은 조명아래 경쾌한 터치로 심연과 같은 여인의 꿈과 한계를 보여준 솔직한 작품이었다.

‘Dialogue in the dark’에서 박종현은 어두운 무대의 네 귀퉁이에 국악기를 배치하고 공중에 한 송이 꽃을 매달았다. 악기의 울림에 따라 몸도 따라 울리는 춤사위가 신선했다.

’쇼팽과의 산책(Une promenade avec Chopin, 4.6~7)'은 ‘인형의 가(家)’(우혜영), ‘휴’(최진욱), ‘HOW TO BE HAPPY'(예효승)와 같은 날 공연된 발레작품이다. 김용걸이 검정색 연미복차림으로, 홍정민은 하얀 드레스차림‘으로 등장해서 김지현이 라이브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Nocturne #10)음악에 맞춰 20분의 그랑 파드 되를 보여준다.

백조와 흑조 두 마리 새가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나누는 듯한 즐거운 아다지오(10분)에 이어 김용걸의 솔로(5분)가 힘차게 구애를 하면 홍정민은 섬세한 솔로(2분)로 화답한다. 하나로 모아진 두 마음이 매력적인 듀엣(3분)으로 마무리한다. 쇼팽의 음악과 발레의 아름다움이 천연적으로 조화를 이룬 시적인 작품이었다.

예효승의 ‘HOW TO BE HAPPY'는 행복의 복합적인 의미를 탐구한다. 그는 굉음이 울리는 공사장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일꾼이다. 아무리 거칠더라도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데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가 전하고자 한 첫 번째 메시지라면 자신과 비교되는 타인의 삶에서 받는 위안이 나의 행복일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메시지일 것이다. 행복은 내 주위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반갑다.   

12인전의 마지막 순서는 50대 이상의 중진무용가들로 구성된 관록의 무대였다. 정은혜는 무용계 데뷔작인 <기다림>(1982)에 35년의 경험을 덧입힌 <기다림2>를 얼굴표정의 변화만으로 보여준다. 한칠은 ‘악마가 속삭이는 소나타-유혹의 메카니즘’을 통해 국립발레단과 미국의 여러 발레단을 섭렵한 발레리노로서의 체험을 서커스와 발레가 혼합된 기예로서 표현했다. 장은정의 <되기, 되기, 되기-앎>은 몸이 어떻게 춤이 되고 어떻게 춤이 완성되어가는 가를 보여주는 철저한 몸의 탐구 작업이다.

무대 가운데 소나무 분재 한그루가 댕그라니 서 있고 장구소리가 먼저 무대를 울린다. 누에고치 같은 흰 물체 안에 꿈틀대는 생명체가 있다. 발가락이 보이고 손이 빠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얼굴과 어깨가 드러난다. 알을 깨고 나온 그녀를 감싸고 있던 베일은 의상이 되고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 몸은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4각의 좁은 공간에서 상체를 드러내고 추는 느린 춤 속에 차오르는 치열한 열기가 느껴진다. 그 열기가 관객을 숙연케 하고 조명이 꺼진 후까지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준다.

이연수의 <드로잉(Drawing)>은 춤이 된 몸이 또 어떻게 몸으로 회귀되는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장은정과 대조적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서 거친 흙바닥을 맨발로 걷는 무용수의 영상과 무대 위의 춤은 닮은꼴이다. 마주 보는 두 손바닥으로 음양의 이치를 표현하고 둥글게 회전하는 양팔의 움직임을 통해 기의 순환을 시도한다. 대숲을 흐르는 바람소리와 손바닥과 대나무줄기와의 마찰음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독특한 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