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미학, 사진가 한정식의 ‘고요’전
선(禪)의 미학, 사진가 한정식의 ‘고요’전
  • 정영신 기자
  • 승인 2017.04.26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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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6일까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내 사진은 고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말처럼 사진가 한정식 선생의 ‘고요’는 그가 추구하는 사진 작업의 지향점이자 존재의 모든 것이다. 사물의 가려진 부분을 읽어내며, 사물 안의 본질을 찾아 시(詩)를 쓰는 과정이 그가 추구하는 사진작업이다.

▲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전시실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사진가 한정식 선생

그는 사물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기다리다, 소통이 빚어내는 언어를 통해 부처를 만난다. 그는 “내 모든 마음을 비우면 사물의 본질이 명료하게 보인다. 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생경한 분야를 개척하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이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사물이 가진 미학을 추구해오며, 사물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그러다보니 완전한 무(無)의 경지에 달해, 그 안에서 부처를 만나게 된 것이다.

▲ 나무,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어느 때가 사진을 찍는 ‘결정적인 순간’이냐는 물음에는 “사물과 작가 내면이 마주치며 존재의 리듬이 들리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사진이 시간과 빛의 예술임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그에게는 선(禪)이란 또 한 가지가 더 존재한다. 빛과 사물에 더해 선이 만들어내는 생경한 ‘시각적 의미’를 들려주는 작가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 나무,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언어만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로도 표현 불가능한 시각적 체험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빛의 세계, 카메라와 사물이 빚어내는 시각적 ‘비가시체험(non-dejavue)’이라 할 일종의 육감적 체험을 뜻한다. 소위 ‘현대사진’으로의 길을 여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내목표의 하나로, ‘시각적 의미’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 발,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 -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장순강 큐레이터는 “한정식은 사진을 통한 추상이라는, 한국사진에서는 짧은 실험에 그친 영역을 40여년에 걸쳐 추구해왔고, 이는 한국사진의 다양성을 위한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주변을 제외한 사물 본래의 모습만 담아내, 마치 물이 융합하는 것처럼 무취무색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보는 이에게 묵시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적막은 생성과 소멸을 벗어나, 어떤 언어로도 이룰 수 없는 무(無)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 발,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것은 은유도 직유도 아니다. 사물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실을 벗어난 궁극의 경지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다’는 명제처럼, 그 사이에는 사진의 알몸만이 오롯이 드러나 예술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서울대 사범대국어과를 졸업한 문학도였다. 청년시절엔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힐 만큼 시인의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봤기에, 사진도 마음이 사물에 닿는 순간 시(詩)를 쓰듯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다.

▲ 강원도 홍천, 2012(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초창기 사진으로 ‘북촌’ 같은 특정 지역을 기록한 작업도 있었지만, 점점 나무와 사람의 발 등 서정적인 피사체를 대상으로 형상화 해왔다. 그 주변의 풍경과 교감하면서 사물의 본래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형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예로 나무의 결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도 하고, 발의 부분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인체를 느끼게도 한다. 그처럼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모습은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에 자유롭게 접근하기에 가능했다.

▲ 경기도 안성, 1985(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작가는 영암월출산 도갑사에서 찍은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살이 그 방으로 안내했지만, 어쩌면 부처가 그 빈방으로 인도했을 것이라 했다.

당시 기와불사를 하던 도갑사에서 기와 한 개당 천원의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머니에 만원권 지폐뿐이라 거슬러 주겠거니 하며 건네줬는데, 보살이 활짝 웃으며 “웬 시주를 이렇게 많이 주세요?” 라며 웃어넘겨, 차마 거슬러 달라는 소리를 못해 물러났다고 한다. 절 경내를 돌아 본 후 일주문을 나서다 기와 불사를 했던 보살을 다시 만난 것이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공양이라도 하시라며 안내한 곳이 그 방이었다고 한다.

▲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 1986(2017), 디지털 프린트

빈방에는 밥상으로 쓰는 탁자 하나가 그를 기다리듯 반겼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전등불 하나가 밝혀 주는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는데, 그 방으로 들어 간 순간이 바로 부처와 만나는 찰나였다. 그 방에 부처가 앉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 경기 가평, 2001(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사진도 하나의 말이라는 작가는 월출산 도갑사 빈방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사물과 만나, 사물의 계시를 기다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이라는 작가는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라고도 했다.

전시장에는 사물의 형태가 지니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한 초창기 사진이었던 ‘나무’와 ‘발’ 그리고 ‘풍경’이 차례대로 전시되어 평생 화두로 잡고 있는 ‘고요’에 의미를 더해 주었다.

▲ 충청북도 단양, 1998(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추측컨대, 작가의 전생은 시인도 사진가도 아닌 스님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러한 작가의 불심이 ‘고요’의 중요한 요체로 작용되었으리라. 말 걸어오는 생명체인 무(無)를 통해 그만의 부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 ‘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한정식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 아카이브에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두 번째 사진 전시로 추진된 한국 추상 사진의 선구자 한정식선생의 전시는 오는 8월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19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보여주는 작품 99점이 전시되어 작가의 사진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2-2188-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