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비평의 窓]창작 오페라아카데미에 희망 준 오페라 붉은 자화상
[예술가의 비평의 窓]창작 오페라아카데미에 희망 준 오페라 붉은 자화상
  • 탁계석 평론가
  • 승인 2017.05.1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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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 더 끌어 올려 명품 만들어야

창작은 어렵다. 때문에 마구 뛰어 들어서는 안된다. 준비운동도 없이 물에 뛰어들면 심장마비 일으킬 확률이 높다. 그런데 우리 오페라에는 준비를 할 그 어떤 운동장도 체육관도 없다.

오페라하우스가 창작의 자궁(子宮)이 되어 자연스럽게 오페라가 잉태(孕胎)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3층 연립주택도 지어보지 못한 건설업자가 갑자기 20층 고층아파트를 지으면 부실이 되듯 우리 창작 오페라의 대부분이 부실로 무너졌다. 지원기금을 타긴 했지만 공사포기가 95% 이상이다. 재공연이 안되는 오페라를 우후죽순 올리다보니 창작오페라가 살아나기 참으로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오페라<붉은자화상>의 한 장면. (사진=ICKHEO)

짜임과 균형감의 형태를 잘 갖춘 작품

지난 5월 6일~7일 서울오페라앙상블이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고태암의 ‘붉은 자화상’을 보았다. 전체적인 구도와 짜임은 음악적 균형이 없었던 과거 나열식 오페라에 비하면 그래도 짜임과 균형감의 형태를 잘 갖춘 작품이다.

무대를 한지(韓紙)로 만들면서 정체성을 생각했고, 빠른 무대 잔환을 통해 지루함을 없애려는 시도도 좋았다. 전체무대는 파스텔 톤으로 조명의 원색(原色)과 흰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색감이 촉촉해 포근하게 안겼다. 미처 윤두서가 누군지도 몰랐을 이들에겐 오페라를 통해 역사 재해석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어느 시대이든 예술가가 겪는 고통과 주류로부터 벗어난 극한의 아픔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이 아닐까 싶다. 윤두서 역시 사랑하는 딸을 잃고 자기를 보는 눈을 얻었다는 스토리상의 메시지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화두로 충분히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져진 것으로 보인다. 김민정 대본도 구조를 잘 짜여 보였고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 관객들은 내용 파악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고태암의 음악은 현대 관현악법을 잘 활용해 극적 장면의 묘사 등에서 선이 굵은 어법을 보여줬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태리 풍이 아닌 독일 바그너에 가까운 흐름이다. 아리아와 중창을 의식해 만든 곡들이 명쾌하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중간 중간 배치되어 흐름에 촉매 역할을 해주었다. 현의 부드러운 화성을 타고 윤두서가 ‘달빛 얼어붙은 이 맘에’ 라던가 ‘아름다운 당신’의 이중창은 내면의 아픔을 선율로 승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인 곡들이다. 한국의 가락도 몇 개 보였지만 시조창을 변용하는 등 눈물을 콱 쏱게하는 깊은 울림의 아리아가 더 나왔으면 한다.

아리아, 중창 등 완성도 더 끌어 올려 명품 만들어야

전체적으로 1부의 끝에 오면서 극적 힘이 다소 느슨해졌지만, 2막에 접어들면서 집중력이 강화되었다. 장면의 마지막에 이르러 에너지가 크게 일어났다. 윤두서와 합창이 ‘눈보라 속에 붉게 핀 황매화야’ 에서 끓어오르는 자화상의 캐릭터가 보였다. 사족(蛇足)은 사자(死者)의 세계를 나타내는 검은 무용 춤과 무대의 신(scene)이 너무 자주 바뀌어 좀 절제되었으면 하는 것과 해설자 격인 윤현의 잦은 등장이 아닐까 싶다. 시작과 엔딩 정도면 좋지 않을까?

▲오페라<붉은자화상>의 한 장면. (사진=ICKHEO)

오페라 아카데미 극장 준비와 과정에 더 디테일한 행정 필요

이번 ‘ 붉은 자화상’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4년부터 시작해 4기에 모두 11개의 작품 가운데 탄생한 아카데미 작품이다. 필자도 여러 작품을 보아온 경선을 거친 작품이긴 하지만 바로 대형무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극장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사전에 대관에 신경을 써 소극장에서 몇 차례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과정의 디테일함이 필요하다. 아울러 아카데미에 본을 보일만한 기존 작품성이 뛰어난 기성 작품들을 올리는 것과 위촉 작곡가를 활용하는 등 유연한 정책이 필요할 것 같다. 바라건데 하루속히 오페라하우스가 정상 운영해 우리도 오페라창작 산실(産室)이 오페라극장 내에서 모든 게 이뤄지는 원(ONE) 시스템의 오페라가 되는 날이 오도록 합심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비빌 언덕이 없어 혼자서 방황하던 창작에 그나마 아카데미가 생겨 멘토링(mentoring)을 받으면서 학구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격세지감이다. 더 다양한 실험과 땀의 현장성이 묻어나기 위해선 대형극장이 아닌 소극장을 장기계약해서라도 더 많은 작품들이 치열하게 작업을 거칠 수 있도록 환경을 놓아주어야 한다. ‘붉은 자화상’이 사후 냉정한 평가를 통해 완성도를 더욱 끌어 올린다면 우리 창작오페라에 희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