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종상 화백] 음치(音癡)의 침묵 속에 엄청난 선율(旋律)이…(1)
[특별기고-이종상 화백] 음치(音癡)의 침묵 속에 엄청난 선율(旋律)이…(1)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승인 2017.05.19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일랑 이종상 화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철학박사 / 서울대학교 초대 미술관장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옛 선비들의 격조 높은 전통 시가(詩歌)와 여창가곡(女唱歌曲)을 ‘정가악회(正歌樂會)’회원인 아내의 음성을 빌어 들을 수 있으니 즐겁고, 우리 민족의 심성, 저 속으로부터 흘러온 가야금의 선율은 음대 국악과에 다니는 큰애의 솜씨를 빌어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늘 음악에 흠뻑 적셔진 채로 그 속에서 생활하고,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음악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것은 곧, 우리 가족들과 생이별을 시킨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쯤 우리 집안의 음악적 분위기를 말하게 되면 내가 꽤나 음악에 소양이 있고 노래도 잘 부를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지독한 오해다.

좀 창피한 말이지만, 내가 어쩌다 신바람 나는 일이 있어 흥이 나면 유행가 가락으로부터 시작해서 학생 때 들었던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탈리아 가곡까지 목청을 돋우어 불러댄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신나는 대목에서 번번이 발생하고 만다. 

 “여보, 애들 음정, 박자 다 버리겠어요.” 그러니 제발 좀 참아 달라는 아내의 애원조 민원이 접수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식 교육상 문제가 있을 정도의 음악 실력이라면 어느 아비가 아내 말을 무시한 채 숫닭처럼 한사코 목청을 돋우겠는가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참으로 아내 말에 자존심 상하게, 아니, 뼈저리게(?) 공감을 하면서, 가족들 앞에서는 침묵으로 음악교육에 봉사 해 온지 오래다.

허나 이 침묵의 고요함 속에는 엄청난 선율의 기(氣)가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노래 아닌 화폭 위로 분출되어 굳어졌으니 내 가슴에 들려오는 천기(天氣)의 운율(韻律) 속에서 무섭도록 정확한 음정, 박자가 지금까지 내 작업의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전시장에서 엄청난 기백의 오케스트라를 체험하고 간다.’며 이 전시를 테마로 꼭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던 그 작곡가에게 나의 모든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는 그림으로써 작곡을 하고 싶었고 그는 작곡으로써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니 우리는 하나가 된 것이리라. 이러저러 세월이 가면서 그때 그 꿈은 서서히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는 항상 사물의 형상을 심안(心眼)으로 보고자 하고 사물의 음성을 심이(心耳)로써 들으니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마저도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기성의 인공물감을 싫어한다. 그저 내 생활 주변의 모든 것들, 쓰다 버려진 전깃줄․ 녹 슬은 철사토막․ 찌그러진 양은냄비․ 황토․ 치자(梔子)나 땡감, 심지어 갈치비늘까지도 모두 내손에 잡히기만 하면 더없이 훌륭한 물감이 되어 나의 작품이 된다.

나는 음악에 대한 생각도 이와 같아서 악보 속에서만 음악이 있고 악기를 통해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명연주자는 명기를 잘 다룰 뿐 음악은 연주자의 심성 안에 있고 그러한 심성은 자연의 이치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기에 이것은 결국 모든 예술가들이 이르고자 함이며 얻어 내고자 함이리라.

그래서 평범한 필부(匹夫)에게도 음악적 심성이 있게 마련이고 음악을 가까이 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나는 일찍이 그림을 통해 마음의 귀(心耳)로써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대자연의 연주소리를 듣고 살아왔으니 온통 음악 속에 절여진 장아찌 생활인 셈이다.
그뿐 아니라, 대지의 말을 듣고 우주의 소리를 들어 자연의 색깔로써, 화판 위에 작곡한다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 온 내 생활은 집에 있으나 화실에 있으나 산에 오르나 들에 가나 온통 ‘음악에 잠겨 사는 삶’ 그 자체이다.

원래 동양에서는 ‘시․서․화’를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이라 하여 하나로 보아 왔다. 시(詩)라는 것이 본래 발생부터가 음악인지라, 예나 지금이나 시어의 흐름 속에는 반드시 운(韻)이 있게 마련이다.  허신(許愼)의 ‘설문’에도 운은 화(和)라 하여 시문에는 반드시 운이 있어야 하고, 같은 소리가 상응하는 것이 운이며 음성의 체무(體務)가 다 운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이런 원리는 서(書)도 마찬가지이다. 서체에 절․골․혈․육(節․骨․血․肉)이 없고 빠르고 느림의 완급(緩急)과 율류(律流)가 없으면 인서(蚓書)라 하여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에 비유되어 서예의 반열(班列)에 끼지도 못했다.

알고 보면 모두가 음정․ 박자가 정확해야 시․서․화를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냥 육신의 귀(肉耳)만으로는 들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기(氣)와 운(韻)의 소리를 느낄 수 있어야만 비로서 시상(詩想)을 떠올릴 수 있고 서체의 골법을 얻어 기운이 충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누가 부질없이 음악을 '시간예술'이라고 하고, 미술을 '공간예술'이라고 분리했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참으로 어이없는 단세포 아메바식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끝없는 우주공간의 광활함을 만끽(滿喫)하며, 조형의 3대 요소인 점과 선과 면이 보이며 색상대비와 재질대비 등 온갖 회화적 요소들을 느끼게 된다.

또, 화판 앞에 서면 노래에는 음치(音癡)로 구박당하면서도 온갖 음악적 요소를 다 즐기고 느끼며 이를 소재로  작품에 임하게 되니 즐겁다. 그러면서 속으로 몇 번이고 ‘음악은 그림이야, 암, 나는 지금 대 오케스트라를 작곡, 지휘하고 있는 거야’ 라며 혼자 신바람이나서 중얼거린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