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범모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더불어 함께하는, 예술인이 동행하는’ 이것이 미술의 정신”
[인터뷰] 윤범모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더불어 함께하는, 예술인이 동행하는’ 이것이 미술의 정신”
  •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5.19 1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미술 알려면 불교를 이해해야, 특정 장르 중심의 역사 인식 문제”

‘못난 나무가 선산지킨다’. <한국미술론>을 펴낸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가 남긴 소감이다. 서양미술 전공자가 대다수를 이루는 미술비평계에서 그는 이제 유일한 한국미술 전공자다. 그렇기에 그의 <한국미술론> 발간은 한국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성과라는 점에서 많은 예술인들의 칭송을 듣고 있다.

그는 우리 미술계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21세기에 19세기 형식만을 강조하는 한국화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장식화’에 안주하고 옛날 방식이 ‘품격’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윤 교수는 가차없이 쓴소리를 하고 있다. 그것은 품격이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 윤 교수의 확신이었다.

그렇게 한국미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미술계의 큰 나무’ 윤범모 교수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 윤범모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사진=정영신 사진가

<한국미술론> 발간을 축하드린다. 출판기념회에서 '못난 나무가 선산지킨다'는 소감을 밝혔는데 지금 다시 소회를 듣고 싶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제 최고참 중 하나가 됐다. 정말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있다. 요즘 큐레이터나 미술비평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서양미술 전공자인데 이들이 현장에서 일찍 떠나고 있다.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어렵게 외국까지 가서 공부하고 왔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제 생각에는 이들이 서양미술과 우리미술과의 차이점을 소화하고 극복하지 못한 것이 이유인 것 같다. 미술은 현장의 역동성이 중요한데 현장에 몸을 싣지 않고 연구실에서만 칩거한다는 것은 미술비평가나 큐레이터로는 자격이 없다고 본다. 미술은 현장의 흐름을 한번이라도 놓치면 절대 극복 못한다. 작가는 슬럼프를 겪으며 방황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비평가나 큐레이터는 현장 흐름을 놓치면 재기가 불가능하다.

미술문화의 거대 담론을 생각하면 할 일이 많다.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인데 혼자 힘으로 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혼자 조바심을 낸 적도 많다. 전통 문화를 계속 발전시키고 감성을 승화시켜 국제무대까지 연결시키는 큰 과제가 주어졌는데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혼자서 하기엔 감당이 안 되고. 이래저래 해야할 일이 참 많다.

참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미술을 집대성한 책을 펴냈다

젊은 시절부터 쓴 논문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 집대성이니, 성과니 하는데 사실 그건 과찬이다(웃음). 미술은 고질적인 장벽이 참 높다. 시대에 대한 장벽, 장르간 장벽, 전시 기획의 장벽,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장벽이다. 이러니 통사를 쓸 수가 없고 협업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국가적인 손해다. 통합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한국미술의 특성을 불교의 ‘범신론’에서 찾고 있다

미래 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한다고 하는데 기계가 할 수 없는 직업이 종교인과 예술인이라고 하더라. 기계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종교와 예술이라는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비중이 가장 많았던 것이 불교였다. 물론 샤머니즘이 있다고는 하지만 샤머니즘은 체계적인 논리가 없다. 우리 민족의 중심을 잡아준 것은 불교였고 불교를 통해 우리 미술이 이루어졌다. 원효대사의 ‘무애(거리낌이 없다)사상’을 주목하는 것, 우리 미술을 알려면 불교를 알아야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윤범모 교수는 최근 <한국미술론>을 출간했다. 사진=정영신 사진가

고려시대 불화의 경우 지금은 구하기 힘든 물감으로 그려져있고 조선 시대 문화가 발전한 것도 불교의 역할이 컸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는데 유교는 예술을 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는 종교였다. 그런데 추사체와 ‘세한도’로 유명한 김정희 선생도 말년에 자신을 ‘병거사(病居士)’라고 칭했다. 거사는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제주 유배 시절에 그린 세한도에도 불교의 ‘돈오(단박에 깨달음)’의 느낌을 갖게 한다. 이쯤되면 김정희 선생이 말년에 불교에 심취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 나라의 미술에 대해서 ‘이것이 특성이다’라고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미술을 한두마디로 정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보다는 ‘작가는 왜 작품을 하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런 원론적인 질문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작가는 왜 작품을 하는가?’ 사실 최근 미술계를 보면 드는 의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 질문이 시대정신인데 요즘은 그 시대정신이 사라졌다. 화가가 수천 수만명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정신을 담는 작가가 없다. 대부분 자신들의 작품을 ‘장식화’하는 것에 안주하고 있다. 물론 장식화가 좋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장식화만’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다. 

일제시대부터 잘못된 미술 교육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교수들은 화가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기능공을 기르고 있다. 양적 팽창이 과연 바람직한 미술 활동일까? 시대는 21세기인데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며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니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동양화가 아사 직전이라고 하는데 그건 작가 스스로가 자초한 거다.

한 예를 들어보자. ‘문인화’라는 장르가 지금 상황에 맞다고 생각하나? 문인화는 조선 시대 양반들이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지금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가? 지금은 민주화 시대다. 시대에 따라 변해야하는데 지금 문인화는 조선시대 양반 양식만 추구하니 시대에 전혀 맞지가 않는다. 서예도 중국 서예가 답습한 것을 마치 정통 서체인양 이야기하는 과거의 풍토를 답습하니 퇴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예 다 망했으면 좋겠다(웃음). 그래야 겨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단색화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일단 상업적인 논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열풍’이라는 것이 오래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선 단색화 작가들이 노령층이 많고 보는 사람들도 그림이라기보다는 벽지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여기에 단색화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도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생존력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미술의 다양성이 아쉬운 대목이다.

단색화 이전에 우리에겐 수묵화가 있었고 수묵화 중심으로 미술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우리는 채색화도 있고 민화도 있다. 민간의 그림도 기본이 채색이었는데 채색이 아닌 수묵이 중심이 되고 있다.

민화는 국제경쟁 1순위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이 우리 민화에 있고 서양에서도 우리 민화를 좋아한다. 채색과 더불어 그림 속에 들어있는 해학과 상징성, 자유분방한 모습, 그리고 그를 통해 드러내는 행복 추구까지 다양한 모습이 들어있다. 이 좋은 장르들을 다 도외시하고 수묵화, 단색화, 문인화 같은 것만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많다고 본다.

책을 보면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을 많이 언급했다. 특히 김복진 선생을 새롭게 알게 된 점이 흥미로웠다

미술사적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있지만 조명을 받지 못했던 작가들을 소개하려했다. 워낙 글만 파고 살았으니(웃음)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데 김복진 선생의 경우는 미술사는 물론 한국문화사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야하는 인물임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연구가 잘못됐다는 증거다.

김복진은 수많은 불상을 만든 조각가이고 근대 조소예술가 1호라는 점도 업적이지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창립을 주도했고 강령까지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5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카프를 연구한다는 자료에도 김복진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강령까지 만든 사람이고 건국훈장까지 추서된 인물이 이렇게 잊혀진 것이다. 

그의 고향인 청주에 유택과 무덤이 있는데 보존이 형편없었다. 무덤도 나중에 겨우 찾은 것이다. 고향에 동상이 서야할 인물인데 보면서 정말 안타까웠다. 동생인 김팔봉 선생의 딸인 성악가 김복희씨가 김복진의 자료를 모두 제게 넘겨줬다. 해마다 김 선생의 기일인 8월 18일에 문우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다. 참여자들이 부모 제사는 깜박 해도 그분의 제사는 잊지 않고 있다(웃음)

시집 <토함산 석굴암> 등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10대 때는 누구나 문학청년이 되지 않나(웃음). 저도 그런 부류였는데 세월의 급류를 타다보니 문학성을 잃어버렸다. 연구를 하면서 석굴암이 우리의 대표작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헌 자료가 거의 없었다. 학자들이 주장한 것은 많은데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 논문을 주장만으로 쓸 수 없으니 참 난감했다.

친구들과 석굴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그 이야기가 쌓이다보니 하나의 상상이 담긴 이야기, 스토리텔링이 쓰여지더라. 논문을 못 쓰니 상상을 발휘해서 소설을 쓸까 했는데 워낙 장편소설을 쓰기가 어려운지라(웃음) 잘 안 됐고, 서사시로 정리한 것이 <토함산 석굴암>이다. ‘복잡하게 논문 쓰지말고 시 쓰라’는 시인 분들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웃음).

▲ <한국미술론>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인사들

올해 101세가 되신 김병기 화백이 출판기념회에서 직접 축사를 하셨다. 현재 한겨레신문에 매주 목요일마다 김병기 화백의 구술을 정리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85년도에 뉴욕에서 만났다. 같이 있던 지인이 김병기 화백을 안다고 해서 같이 차나 한 잔 마시자고 해서 김 화백을 만났다. 이분이 20년 동안 미국에서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국내에서 개인전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김 화백이 20년만에 국내로 돌아와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도 그분은 제게 ‘은둔자를 발견했다’는 말을 해주신다(웃음).

김 화백님은 여전히 건강하시다. 기억력도 좋으시고 구술을 받으러 댁을 찾아가면 직접 음식을 주실 정도로 건강하시다. 1년 넘게 신문에 연재될 것 같은데 독자들이 재미가 없다고 하면 당장 연재를 중단하라고 했다(웃음). 

전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으시니(웃음) 우리가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백석, 윤동주, 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20세기 한국문화사의 빈 칸을 채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 것이다.

<한국미술론>을 볼 독자에게, 그리고 미술계를 위해 하고픈 말이 있다면?

앞에서 한국미술의 특성을 한두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다르지만 관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본다.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창작은 해석이다. 해석의 신축성과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술을 고답적으로 보는 경향에서 탈피해야할 것 같다. 사실 미술은 일상 생활에서 ‘뭔가 써먹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한다. 미술이 마치 박제처럼, 화석처럼 보여지고 생활과 멀어진다면 의미가 없다. ‘더불어 함께하는, 예술인이 동행하는’ 그것이 지금 필요한 정신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