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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음치(音癡)의 침묵 속에 엄청난 선율(旋律)이…(2)
2017년 06월 05일 (월) 11:25:06 이종상 화백/서울대초대미술관장/예술원회원 sctoday@hanmail.net
   
▲이종상 화백/서울대초대미술관장/예술원회원

[지난 호에 이어서]한국인들의 그림에 대한 생각들은 시간과 공간 같은 개념들을 별개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통합개념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림 속에 문기(文氣)를 요구했고 그것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서권(書卷)의 기(氣)와 문자의 향(香)을 내세워 ‘시․서’를 필수 요건으로 삼았다.

이처럼 운․율을 중시하는 ‘시․서’는 화와 통합되어 기운론(氣韻論)으로 동양예술의 중핵사상(中核思想)을 이루게 된다. 우리의 옛 선인들이 치세목민(治世牧民)을 ‘악(樂)’으로써 가늠하였음은 시공을 하나의 통합된 우주 질서로 보아 자연과 인간의 심성이 모두 기운으로 이루어지고 악으로 통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여소송(余紹宋)의 ‘화법요록(畵法要錄)’에 보면 기운은 먹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붓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의(意)에서 나오는 것도 있고, 무의(無意)에서 나오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 이중에서도 홀연히 그렇게 된 무의, 즉 무위지기(無爲之氣)를 지고(至高)의 목표 삼았다.

이것은 화가뿐 아니라 음악가에게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화가나 음악가, 그 외의 어떤 사람도 궁극에 가서는 우주의 근원형상(根源形象:Ürfiguration)을 심안으로 보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운율의 ‘악’을 심이(心耳)로써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오래 전에 중앙일보 주최로 호암갤러리 전관에서 열렸던 내 초대개인전 전시장을 찾아 온 기자와 작품에 관한 인터뷰 내용이 모(某) 잡지에 실렸는데 그 글 속에서 나는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며, 형사(形似)를 보지 않고 근본을 보기 위해 수도 없이 산과 들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가 눈앞에 있으나 나무는 보이지 않고, 숲이 보이더군요. 숲이 보이는가 했더니 이내 숲은 사라지고 산의 속살이 보이더군요. 그러나 또 그 산은 온데간데 없고  거기 흐르는 맥(脈)이 집히더니 결국에는 그 깊은 속에 세(勢)가 숨어 있음을 알고 나니 바로  기(氣)가 느껴지면서, 만유의 형상이 모두 음률로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이제 산을 보면 소리가 들리고 어떤 기운이 느껴지면서 풍수쟁이가 다 되었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산하의 정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산하의 소리, 그 기운, 그리고 이것들을 생성시킨 우리의 강토, 우리의 자연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을 만들고 우리의 자생문화와 사상을 키우는 뿌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사상을 통해 본 태초의 자연에 존재한 근원적인 내재율을 형상화시킨 원형상(源形象:Ürfiguration)의 작품들을 잉태시킨 요인이지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나는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를 기에 의한 하나의 경향태(傾向態)로 보고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근원적 현상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역(變易)해 가는, 어쩌면 영원히 완결 지을 수 없는 미완(non finito)인 채로 흐름의 과정만이 음악으로 들려오는 것이리라.

나는 일상의 삶으로부터 혹은 자연으로부터 아니면 허허로운 저 우주공간으로부터 쉼 없이 보내져 오는 현묘(玄妙)한 음악을 듣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그 운율을 삭혀두면 이것이 형상화되어 마치 간혈천(間歇泉)처럼 저절로 뿜어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나의 작품은 어떤 현상을 구체화시킨다거나, 간소화시킨다거나 혹은, 변형․과장시키는 그런 작업이 아니라 모든 현상을 소리로 감지하고, 들려 온 음률이 스스로 시각화 되어가는 과정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모든 사물의 현상이 율려(律呂)로 파악되기 때문에 나에게는 유기물이든지, 무기물이든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 있어 숨을 쉬고 운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음정․박자도 모르는 천하 음치가 음악 속에 파묻혀 ‘음악 고픈’줄 모르고 음악으로 그림을 그려 갈 수 있는 까닭이 다 이와 같기 때문이다.

진실로 훌륭한 악공은 줄 없는 가야금을 탈 수 있어야 하고 진정으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이는 무현금(無鉉琴) 타는 가락에 추임새로 구성지게 받아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반드시 육신의 고막(鼓膜)을 자극하여 들려오는 소리로 한정 짓는다면,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부질없는 얘기가 되고 만다.

이것은 음악의 출발점을 겨우 오선지로 한정 지으려는 어리석음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겠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음악감상', 귀로 들을 수 있는 '미술감상'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실로 자연을 관조(觀照)하고 예술을 만끽(滿喫)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개인전이 열리던 날 음악을 전공하는 딸아이를 보고 무슨 선문답이라도 하는 듯이  “유나야, 너는 애비가 작곡해 놓은 이 숱한 작곡들을 보고 어떤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딸아이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아빠! 지금은 못할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아빠의 작품을 듣고 꼭 연주해 보고 싶어요.” “그래라. 그림은 듣고, 음악은 볼 줄 알아야한다”  음치인 애비 작품을 보고 딸아이에게 뜬금없이 연주해 보라는 주문에 당황하지 않고 “더 공부해서 연주해보겠다”는 대답을 듣고 보니 그동안 음악을 통해 성숙된 자식의 모습을 새삼 발견하고 내심 대견스러움을 느끼며 한동안 부녀지간에 침묵이 흘렀다.

그 후 20여 성상이 훌쩍 지났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우주의 소리가 들려와 견딜 수가 없어"라며 "원형상"이라고 이름붙인 숱한 창작곡을 발표한 딸아이의 스승인 김정길 교수님은 당신의 고희기념 창작음악회를 아예 "원형상 창작발표회"로 명명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수 십곡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나는 다시 그 음악 속에서 색을 발견하고 현상을 보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낸다. 이는 진실로 음악과 그림이 하나 됨을 보여주는 시공일치의 율려진공(律呂眞空)일 터이고, 무위의 울림(韻律)은 만유의 근본이요 기(氣)가 생(生)하면 운(韻)이 동(動)하는 동양예술의 극치인 기운생동(氣韻生動)에 다름 아니다.  그림은 고요하나 소리를 내고, 음악은 소리를 내나 고요함을 알게 되면, 세한도(歲寒圖)의 적막 속에서 소리가 들리고,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음율 속에서 고요가 보이면 비로서 둘이 하나임을 터득(攄得)했다 할 터이다.                                                         

이종상(1938-)화가,서울대학교미대졸. 동국대대학원졸.철학박사,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사)국악진흥희 이사장, 서울대학 교박물관장 및 초대 미술관장 역임. 은관문화훈장서훈. 현 서울대 명예교수, 상명대 석좌교수, 대한민국예술원회원, 작품으로 <고등법원 및 대법원 로비대벽화>, <국립극장 로비벽화>, <삼성본관로비대벽화> 등이 있으며 저서로 <畫室의 窓을 열고>. <솔바람 먹내음> 등이 있다.

 *이 원고는 지난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명사들의 국악사랑에 실렸던 원고를 재 게재함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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