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 미술시장 이야기]좋은 예술은 대중과 친하기 어렵다?
[박정수 미술시장 이야기]좋은 예술은 대중과 친하기 어렵다?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7.06.0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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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2016년 미술계 한켠에는 한복 그림의 표절논란이 일어난 적 있었다. 한복 입은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복을 입고 현대 기기문명을 사용하는 낯선 모습의 그림이 문제가 된 일이다. 한복을 입고 스마트폰하고, 한복을 입고 오토바이타고, 쪽진 머리에 헤드셋 한 모습 등의 그림이었다.

우아하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그림이 논란이 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한복이라는 전통의상과 현대문명의 만남에 있었다. 결혼식이나 명절이 입던 우아하고 품위 있는 한복이 라면이나 게임과 만나면서 가볍고 경쾌한 젊은 감각의 결합이었다. 불과 1년 남짓 지난 일임에도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해졌다. 한복 그림은 논란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인사동과 삼청동, 북촌이나 고궁 근처에 가면 한복이 넘쳐난다. 한복입고 자전거 타고, 한복입고 스마트폰 하고, 한복 안에 청바지 입는 일은 여사가 되었다. 그림으로만 봄직한 일들이 일상에서 무작위로 일어난다.

한복이 관광 상품이 되면서 신선함이나 고귀성, 우아함과 품위가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예술은 대중을 짝사랑한다. 대중은 예술에 목말라하지 않는데 예술가들은 대중의 곁에서 숨을 쉬고 싶어 한다. 대중은 어렵고 힘겨운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예술은 대중의 언저리에 맴돌아야 한다.

지난 5월 20일 서울역 앞 <서울로 7017> 고가공원 개장을 기념하는 설치물이 ‘슈즈트리’가 9일만인 29일 생명을 잃었다. 황지해 작가의 작품으로 버려진 신발을 예술작품으로 재생산되는 업사이클링(up-cycling)으로 시도된 작품이다.

헌 신발 3만여 켤레로 제작되면서 도심의 흉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지만 높이 17미터로 신발이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모습으로 완성 되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역겨운 냄새의 하소연으로 결국 철수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7017>은 1970년대에 조성된 고가를 17군대의 사람진입로, 17미터의 높이의 의미가 합성된 서울역 인근의 고가공원이다.

예술작품이 흉물로 취급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예술이 정치나 경제, 대중의 입장에 의해 구속되거나 제한된다면 인류의 정신진화는 더디게 일어나고, 미래적 삶에 대한 예측이 일반화되게 된다. 예술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현재적 결론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술작품이 대중의 요구에 의해 철수되거나 어떤 장애적 요인에 의해 제한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일어나지 않은 정신적인 문제에 의해 대중의 입장에서는 낯설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에 대한 잘함과 못함으로 판단되어서도 안 된다.

예술가에 의해 생산된 예술작품은 어느 사회 혹은 어느 집단의 정진진화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의하면 사회의 어느 부분은 잘못된 조직이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다른 계층의 대중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2014년의 부산롯데백화점의 스파이더맨 철거 문제와 올해 상반기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된 전시작품 ‘더러운 잠’ 훼손의 문제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은 대중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상관없이 자유롭게 창의되고 존재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서라도 정치적 경제적 집단적 방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서울시의 공원에 설치된 미술작품이 시민과 호흡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철수하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옮겨 보존함으로서 업사아클링에 대한 예술적 가치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작가가 애초에 의미 하고자하였던 환경과 산업 폐기물의 문제, 재활용에 대한 의미들, 정크아트(Junk Art)에 대한 사회적 관심 등은 버려져야 할 문제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