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소정,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장례
배우 윤소정,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장례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6.1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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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인 배우 오현경과 딸 오지혜 등 연극인 가족

배우 윤소정씨가 패혈증으로 16일 오후 7시 12분 별세했다. 향년 74세.

윤소정씨는 <초분>, <신의 아그네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이미>, <어머니>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 연극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영결식은 20일(화) 오전 9시 30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엄수되며, 연극인을 대표하여 배우 길해연씨가 조사를 낭독한다.

▲사진은 극단자유 50주년 기념 출판물에 실린 이병복 선생에게 바치는 '금혼식'에 실린 생전의 윤소정씨 모습.

유족은 원로 연극배우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남편 오현경과 딸 오지혜, 아들 오세호, 사위 이영은, 며느리 김은정이 있다.

빈소는 서울 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이며, 발인은 20일.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다.

1944년 7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난 배우 윤소정(尹小晶)씨는 아버지 윤봉춘과 어머니 문수남의 3남 4녀 중 다섯째로 본명은 윤태봉(尹泰峰)이다. 소정이란 이름은 ‘작고 밝은 수정’이라는 뜻으로 아버지인 금원(琴園) 윤봉춘 선생이 지어 준 이름이다. 금원 윤봉춘 선생은 춘사 나운규 선생과 함께 한국영화 개척기를 이끈 영화감독이자 배우이다.

윤소정씨는 어린 시절 무용에 재능을 보여 6세에 송범무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후 20세까지 김백봉, 김문숙, 강선영 선생을 사사했다. 학창 시절 다수의 무용대회에서 수상한 상장이 동명여자중학교 복도에 빼곡하게 걸려있었으며, 동명여자고등학교에 재학 당시 독보적인 무용 실력 덕분에 전교생 중 유일하게 머리를 기르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감독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창 시절부터 연기 활동을 했으며, 데뷔작은 중학교 1학년 때 출연한 아동영화 <해바라기 피는 마을>이다.

1964년 동양방송(TBC)이 개국하고 공채 1기 선발 당시 윤소정씨는 탤런트 부문과 무용수 부문에 각각 지원하여 모두 합격했으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오빠 윤삼육과 선배 배우들의 권유로 연기자의 길을 택한다.

1966년 극단 ⌜자유극장⌟이 창단되던 해에 김혜자, 선우용녀, 故김무생, 최불암, 박정자 등과 함께 창단 멤버로 연극계에 입문하여 극단의 창단 공연인 <따라지의 향연>에 출연하였다.

1970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산불>에서 윤소정씨는 ‘귀덕이’역을 맡아 공연했고, 당시 연출이었던 임영웅 선생의 권유로 ⌜극단 산울림⌟의 창단 멤버가 된다. 이후 1975년까지 극단 산울림에서 <부정병동>, <겨울 사자들>, <가위바위보>, <환절기> 등 다양한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배우로서 크게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은 1973년 공연한 <초분>이다. 실험적이고 충격적인 무대로 당시 연극계에 화제가 된 <초분>에서 윤소정씨는 무용 전공자답게 과감하고 격렬한 움직임으로 무대를 압도하며 대중과 평단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당시 활동했던 여배우 중에는 무대 위에서 윤소정씨처럼 자유롭게 몸을 잘 쓰는 배우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다.

1975년 <태> 공연 이후 잠시 연극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윤소정씨는 김도훈 연출이 1979년 창단한 극단 ⌜뿌리⌟의 창단멤버로 연극 활동을 재개한다. 배우 정동환씨와 함께 연극 <부도덕행위로 체포된 어느 여인의 증언>에 ‘프리다’ 역으로 출연하여 대담한 연기를 펼쳤으며, 공연의 연출인 김도훈씨는 미어터지는 관객 때문에 극장 안에 입장하지 못할 정도로 연일 객석이 가득 찼다고 회상했다. 이 작품으로 윤소정씨는 제16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한다.

1980년 윤소정씨는 김도훈 연출의 권유로 모노드라마에 처음 도전한다. 젊은 시절 잠깐 만난 목사를 사모해 하얀 드레스를 입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 기이한 시인의 이야기를 다룬 모노드라마 <아메스트의 미녀>에 윤소정씨는 주인공 ‘에밀리 디킨즈’로 출연한다. 신들린 연기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기이한 캐릭터를 탁월하게 표현했으며 이로 인해 ‘부도덕한 여인’과 ‘백색의 신부’를 넘나드는 팔색조 연기자라는 평을 듣는다.

1982년에는 테네시 윌리엄스 작 <올페>에서 주인공 ‘레이디 토란스’ 역을 맡아 열연하였으며, 이 작품으로 제19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한다.

1983년 윤소정씨는 당시 10개월 동안 장기 공연되어 큰 화제가 된 <신의 아그네스>에 출연한다. 이 작품에서 윤소정씨는 ‘닥터 리빙스턴’ 역을 맡았으며, 미리엄 원장수녀 역에 이정희씨, 아그네스 역은 윤석화씨가 맡았다. 윤소정씨는 <신의 아그네스>에 캐스팅 된 후, 미국 브로드웨이에 가서 홀로 <신의 아그네스>를 관람할 정도로 작품 분석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라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 <애니>, <그해 치네치타의 여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두여자 두남자>,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등 수많은 작품에서 활약했으며, 유독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이 화제가 되면서 ‘동숭동 불륜 전문 배우’라는 별명이 생겼다.

윤소정씨는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오르는 한편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연기를 펼쳤다. 특히 1997년 출연한 영화 <올가미>에서 보여 준 시어머니 연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배우로서 갖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가정에 헌신적이고 요리 솜씨가 매우 뛰어났으며, 신문에 자신의 요리 비법과 레시피를 연재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배 배우인 오현경씨와 1968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첫째는  배우 오지혜)를 두었다. 세련된 안목과 손재주를 겸비하여 어린 시절부터 의상디자인과 제작을 했으며, 결혼 후 30세에 시작한 ‘소정옷집’을 20년 간 운영했고, 10여 편의 연극 무대의상을 디자인한 경력도 있다.

윤소정씨는 중년이 된 이후에도 따뜻한 ‘어머니’ 이미지와 함께 격정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여인’의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크고 깊은 눈은 풍부한 감정을 오롯이 객석에 전달했으며, 오랜 무용 훈련 덕분에 무대에서 우아하고 가뿐하게 움직였다. 거침없고 도발적인 대사를 쏟아내다가도 돌연 차갑고 지적인 목소리로 객석을 서늘하게 하는 -극장의 공기를 자유롭게 전환하는- 신비로운 배우였다.

환갑을 넘긴 이후에도 꾸준히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2004년 60세가 되어 출연한 연극 <잘자요, 엄마>에서는 실제 모녀 사이인 배우 오지혜씨와 함께 무대에 올라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두 연기파 배우의 혼신의 연기를 보며 객석의 관객들은 연신 눈물을 쏟았다.

2006년 출연한 연극 <강철>은 남편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복역 중인 여인이 15년 만에 딸에게 자신의 심정을 풀어놓는 이야기로, 연출가 한태숙은 <강철>의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윤소정씨를 떠올렸다고 한다. 윤소정씨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작품에 매달렸고, 이 작품으로 제17회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다. 평론가 유민영은 “예술하는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자만하기 쉬운데 윤소정씨는 정반대의 인물로 한국 현대연극사에서 여배우 정통노선을 계승한 연극인이자 훌륭한 가정을 이룬 성공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후 2010년, 윤소정씨는 67세에 자신의 대표작을 또 다시 추가한다. 미디어를 혐오하는 완벽주의 여배우와 미디어의 힘을 맹신하는 젊은 영화감독 사위의 갈등을 그린 작품 <에이미>. 같은 해 10월, 베토벤의 왈츠 변주곡인 ‘디아벨리 변주곡’ 연구에 몰두하며 루게릭병과 싸우는 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33개의 변주곡>. 특히 <33개의 변주곡>은 공연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 투입되었고, 대상포진을 앓으면서도 엄청난 양의 대사를 20일 만에 다 외워 공연했다고 한다. 두 작품으로 제3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으며, <에이미>는 2013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윤소정씨 주연으로 재공연 되었다.

2016년, 유럽 문학상을 휩쓸고 있는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국내 초연작인 <어머니>에서 주인공 ‘안느’ 역을 맡았다. 윤소정씨는 빈 집에 홀로 남겨진 채 상실감으로 자아가 붕괴되어가는 ‘안느’의 불안한 내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흐트러짐 없는 대사와 무대를 가득 채우는 아우라는 “배우 윤소정”이 자신의 대표작을 앞으로 계속 축적해나가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했다.

유작이 된 SBS드라마 <엽기적인 그녀>에 자혜대비로 출연했으며, <엽기적인 그녀>는 사전제작 드라마로 모든 촬영을 마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