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국립무용단의 신작공연 ‘리진’
[이근수의 무용평론] 국립무용단의 신작공연 ‘리진’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7.14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신경숙의 소설 ‘리진’을 3년 전에 읽었다. 위태로운 구한말을 배경으로 궁중무희 리진과 불란서공사(콜랭 드 플랑시)와의 사랑과 리진을 연모하는 궁중악사의 애틋한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낸 장편이었다. 언젠가 ‘리진’을 원작으로 무용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김상덕의 국립무용단장 취임 후 첫 기획이 리진이란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뻤다. 더블캐스팅이 설정된 ‘리진’(6.28~7.1, 해오름극장)을 개막 첫날과 마지막 날 두 번 보았다.  

막이 오른 무대 위에 리진(이의영, 이요음)과 도화(장윤나, 박혜지)가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사람은 죽지만 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그 춤을 추고 있는 거야.” 궁중 무희면서 경쟁자이기도 한 그들의 육성과 함께 춤이 선보이며 중간막이 올라간다. 뒷면 벽에 초승달 모양의 스크린이 빨랫줄처럼 길게 걸려 있다.

현란하게 변화하는 폭 좁은 스크린 속 영상이 작품의 내레이션 역할을 한다. 두 여인을 중심으로 춤추는 군무진에 왕과 왕비가 등장하고 카메라를 든 프랑스 공사 플랑시(황용천, 조용진)와 궁중의 권력자인 원우(송설)도 등장한다. 리진과 플랑시, 도화와 원우, 왕과 왕비가 얽히고설키며 사랑과 질투, 모함과 복수, 화해와 죽음을 플로트 삼아 무용극이 펼쳐진다. 

심청, 춘향, 호동, 논개 등 제한된 소재에 묶여 있던 무용극에서 ‘리진’의 발견은 획기적이다. 열강들이 한반도에서 각축을 벌이던 시대적 배경, 미모의 궁중무희, 폐쇄된 사회에서 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이주한 신세계, 왕실이 허락한 혼인과 금지된 사랑 등 극적인 요소가 골고루 갖춰진 소재는 신선하다.

그러나 정작 불륜을 의심받아 죽음에 이르는 왕비, 불란서를 침략한 조선, 리진의 살해와 새 왕비가 된 도화의 죽음 등 비현실적 요소들로 뒤틀린 대본은 실패작이다. 외국에 이주한 개화기 조선 무희가 받는 문화적 충격과 궁중악사의 애틋한 사연 등 원작의 하이라이트가 대본에서 사라진 것도 아쉽다. 

더블 캐스팅이 설정된 배역 면에서도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다. 이의영과 황용천이 주역으로 등장한 첫날의 캐스팅은 상대역인 장윤나, 송설에게 압도당하며 주역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것이 마지막 날 공연장을 다시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요음과 조용진, 박혜지와 송설로 짜인 두 번째 배역은 성공적이다. 리진과 플랑시가 무대의 주도권을 찾고 상대역인 도화, 송설과의 조화가 이루어지면서 무대가 안정되고 열정적인 듀엣과 역동적인 군무가  시너지효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국립무용단의 단골 주역을 대신하여 새로운 얼굴들을 시험한 김상덕의 노력은 의미가 있었다. 

음악과 의상, 조명 등 무대 요소 면에서도 기대와 우려는 되풀이 된다. 벽면 전부를 사용하는 대신 띠 모양의 스크린을 설정하고 좌우로 흘러가는 키네틱 영상을 통해 무용극의 흐름을 설명하고자 한 무대와 영상디자인(정승호, 조수현)은 인상적이었다.

노랑과 자주색치마로 리진과 도화를 차별화하고 무사들의 전투적인 복장을 통해 시대적 위기감을 강조한 한진국의 의상은 모호한 국적임에도 효과적이었다. 드라마틱한 장면들에 비해 음악과 조명의 역할이 미미했다는 것은 작품의 극적효과를 반감시킨 요소들이었다. 

예술감독 부재상태로 1년여를 표류하던 국립무용단이 새 감독을 맞아 기획한 첫 작품인 ‘리진’에 대한 기대는 컸다. 울산시립무용단을 이끌다가 신데렐라처럼 중앙무대로 픽업된 김상덕의 감독역량에 대한 우려와 무용극형식에 대한 의문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무용극 소재의 발견과 이요음, 조용진, 박혜지 등의 주역실험이 긍정적인 반면에 공연요소들의 적절한 활용은 미흡했다.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라 할까. 첫날 공연보다 훨씬 더 짜임새를 보여준 넷째 날 공연은 그가 보여준 긍정적 시그널이다.

국립무용단 출신이란 강점을 살려 단원들과의 수평적 소통을 강화하고 ‘회오리’에서 보여준 국립무용단의 축적된 에너지와 세련미를 찾기 바란다. 대본의 수정과 음악의 보완을 통해 ‘리진’이 국민무용극으로 우뚝 설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