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길량 목조각 장인 “불상 조각, 기도하는 사람처럼 간절함 가지고 해야”
[인터뷰] 허길량 목조각 장인 “불상 조각, 기도하는 사람처럼 간절함 가지고 해야”
  •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7.14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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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에 빠져 ‘무념무상’ 되어야 작품 나와, 기계화 시대에 오히려 수공업 각광받을 것”

불모(佛母). 부처의 어머니. 바로 불상을 조각하는 조각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천수경에도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부처를 만드는 이기에 불상 조각은 어느 작업보다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나무 하나라도 부처의 몸이 되어야하기에 소중하게 다루고 작업 또한 기도를 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이 불상 조각이다.

그렇게 불상을 만들어온 허길량 장인은 지난 2014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33비천상’을 선보였다. 여느 불상보다도 세심함이 필요한 그의 비천상을 본 사람들은 ‘염원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밝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허 장인이 불상을 만들면서 빌었던 염원은 과연 무엇일까?’ 

▲ 허길량 목조각 장인

불모 허길량 장인은 15세부터 조각에 입문해 오롯이 50년을 목조각 한 길을 걸어왔다. 목공예 분야에 입문해 서수연 스승과 이인호 선생으로부터 불화와 단청을 익혔고, 1980년부터 마곡사 우일(又日) 스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도상, 의식기법을 전수받은 전형적인 목조각 장인이다.

그는 수제자인 한봉석(경기 무형문화재), 임성안(전북 무형문화재)을 무형문화재로 키워냈다. 대학 시절 그에게서 불교 조각을 배운 홍석화 ‘에이치컬쳐테크놀러지’ 대표는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사업으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허 장인은 2001년 국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2002년 ‘33관음 속으로’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어 놀라운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불교계 및 목조각 분야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만 3년이 됐을 때, 모함에 의해 송사에 휘말리면서 문화재 지정 해지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 2011년 5월 법원으로부터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미 자존심과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세상 사람들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자신을 모함했던 문화재청 직원은 벌써 퇴직했다. 그는 무엇보다 세속적 자리다툼이나 벌이는 사람으로 취급당한 것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허길량 장인은 “장인들에게 인간문화재 칭호는 빛나는 명예이자 자부심”이라고 했다. 그는 진상이 밝혀졌으니 인간문화재 자격이 원상회복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바람이 곧 이루어질지는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에게 그에 합당한 복구가 내려져야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일 것이다.

그런 고통을 겪은 후 12년 만에 재 비상의 날개짓으로 열린 33비천상 전시회는 그에게는 현재까지도 숙제로 남은 ‘염원’이 가득 담길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조각된 불상들이 그의 계속되는 노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여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지난 7월 초에 그의 작업실이 있는 고양시를 찾았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불모의 자존심을 꿋꿋히 지켜나가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섬세하고 웅장한 대형 목조각들로 기자를 압도했다. ‘수행’의 마음가짐으로 불모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한다.

▲ 허길량 장인은 불교 목조각의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손은 드문드문 상처가 있었지만 그가 깍아낸 정교한 목조각처럼 곱고 컸다.

현재 불교 조각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나?

만드는 사람들은 2~3백명 정도 된다. 문제는 배우는 사람이 없다. 이대로 가면 50년 후에는 끊어진다. 일단 밥먹고 살 수 있는 일이 아니잖나(웃음). 2~3년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적어도 그 정도 시간 되면 밥벌이가 되어야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서 한다면 모를까 참 어렵다. 

특히 불상은 더 어렵다. 그림은 어느 정도 신인들이 배출이 되는데 조각은 참 나오기가 힘들다. 특히 불상은 어려운데다 종교의 영향도 있어서 젊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 50년 후에는 끊어질 것 같다.

지금 제 제자 2명이 무형문화재가 됐고 제게 배운 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웃음). 그 정도 되는 사람들은 한 백여명은 될 것이다. 사실 이들의 차이는 문화재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차이인데 종이 한 장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실력이 있는 이들이다.

지난 2014년에 예술의전당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비천상’을 선보여 주목받았는데

10년간 작품을 모았다고 해야한다. 작업을 하다가 부탁이 들어오는 작품이 있으면 그것을 해야하고 혼자하기 어려워 제자들과 이 하고 그렇게 10년을 걸려 전시를 한 것이다. 

비천상은 기술적인 노하우가 있어야한다. 기교를 부려야하고 테크닉이 있어야한다. 불상은 어떻게보면 사실 단순하다. 부처의 얼굴이 중요하지, 다른 부분은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비천상은 기술적인 난이도가 있다. 하나의 통나무에 날렵함이나 우아함을 다 새겨넣어야한다. 시간 싸움이다. 보통 조각도로는 파낼 수가 없기에 조각도도 새로 제작해야한다. 그렇게 어렵게 나오는 것이 비천상이다.

한두작품 하다가 작품을 해보자는 생각에 33점을 했는데 하늘의 33천이 있지 않나. 언론에서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조각의 내용이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다. 그래서 '공양비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렇다면 계속 부처상으로 갈 생각인지?

아니다. 예전 어머니들이 썼던 다듬이목을 생각하고 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다툼이 있으면 며느리는 다듬이목으로 자신의 화를 풀었다. 거기에 착안해 선택받은 다듬이목이 동자로 환생되는 모습을 담으려한다.

지금 53부를 다 완성해놨고 전시 기회를 보고 있는 중이다. 다듬이목이 단단한 닥달목인데 조각을 완성해서 옻칠로 마감처리하고 거의 100% 다 완료한 상태다. 올 가을에 전시를 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다.  여러 고민을 하고 있다. 

작업할 때 사포질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무의 질감을 나타내려면 조각도 자국이 남아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포질을 하지 않고 조각도로 면을 곱게 한다. 이것도 결국은 시간 싸움인데 그렇게 나무의 질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릴 때 동자승으로 있었을 정도로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다. 그것이 지금의 불상 조각으로 이어진 것 같은데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고 선암사에서 1년 정도 살았다. 어머님께서 불심이 강하셔서 그 영향도 있는 것 같고 15세에 조각에 입문하면서 철이 빨리 든 것 같다. 처음 배울 때는 일반 조각의 기교를 배웠는데 기교가 늘면서 불교 미술로 접어들었고 조선 불교 미술을 이어온 훌륭한 스승님들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다.

종교 조각은 교리에 맞지 않으면 조각품에 불과한 것이다. 큰 어른들께 사사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아 제자들이 무형문화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시대에 목공과 목조각을 이어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기자고 있다. 

좋은 나무를 확보해야한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 같은데

재료를 구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요즘은 주로 은행나무를 많이 쓰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좋은 나무가 오면 연락이 오기 때문에(웃음)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다.

결국은 기술의 차이, 관리의 차이가 있다. 옛날 부처님을 조성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나무가 주재료인데 똑같은 나무가 산에 있어도 불상의 몸이 되어야하기에 반듯한 나무를 선택해야한다. ‘불모(佛母, 불상을 만드는 사람)’의 눈에 괜찮겠다 싶은 나무를 선택한다.

나무를 선택했으면 그 나무에 공을 들여야한다. 부처님의 몸이 되어야하니까 잡귀가 끼면 안되기에 황토를 뿌리고 동거울을 걸고 향물에 목욕을 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산신제, 목신제를 지낸 후에 작업을 한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잖나. 옛날 같이 부처 조각을 한다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어야지(웃음). 다만 그런 의식만이라도 가지고 임해야한다는 것이다. 

▲ 허길량 장인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가지는 마음이 있는지?

불상을 조각하는 마음은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똑같이 간절함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조각에 빠져야한다. 빠져야 작품이 나온다. 무념무상에 빠져 몰입할 정도가 되야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술과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제 제자들도 저와 같이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술을 먹이려했지만 모두 다 이겨냈다. 지금은 누구도 술을 권하지 않는다(웃음). 이것만 지켜도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한 축을 이뤄야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수용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만인들이 기도해서 기를 받아갈 수 있는 그런 불상이 탄생해야지 그것이 없으면 그것은 나무토막에 불과하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불상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불모’는 천수경에 엄연히 나오는 말이다. 부처의 어머니다. 이 의미를 모르고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참 안타깝다.

부처상이 아닌 일반 조각들을 만들 생각은 없는가? 다른 종교와 연관성을 가진 작품을 시도할 생각은 있는지?  

해달라고 하면 해주겠는데 제안이 안 들어온다(웃음). 여러 종교와의 혼합은 시도하지 않았다. 단군상 정도는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그 이외에는 생각이 없다. 부탁이 온다면 만들 수 있겠지만 특별하게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찾아서 작품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불교미술만으로도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법화경 변상도를 새긴다면 어마어마하고 대단한 일이 될 것이다.  꼭 하고픈 일이지만 비용이 엄청나게 소요되기에 스스로 하기는 참 어렵다. 후원자가 나왔으면 한다. 꼭 만들고 싶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보유자로 지정됐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서 해제됐다

그 사건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뽑는 규율을 어기고 잘못한 것이 문제의 시초였다. 이미 세 사람을 뽑았는데 또 뽑는다는 것도 의문이었고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문화재를 공채로 뽑는다고 공고했다.

스승이 무형문화재인데 제자가 무형문화재가 될 수는 없잖나. 그런데 제자가 무형문화재가 되겠다고 나섰다. 문화재청이 자격없는 사람을 문화재로 만들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를 놓고 공예원들이 민원을 제기했는데 인정 예고를 강행했고 민원이 몰려든 이유를 모두 저에게 돌렸다. 그런데 명분이 없지 않나?  ‘누군가가 돈을 주고 무형문화재가 되려 한다는 소문을 허길량이 내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그 사람은 지방문화재가 됐고 저는 박탈당했다. 복권을 하려했지만 법이 없었다. 박탈하는 법은 있지만 복권시키는 법은 없더라. 

그무렵 저는 대안학교를 만들 생각을 했고 건물을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돈이 생겼고 대출도 받아서 청소년들에게 기술 장인들이 직접 지도하는 학교를 만들기로 했는데 문화재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대안학교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전통 공예를 가르치는 곳을 만들려했는데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제가 문화재가 됐을 때가 만 48세였다. 문화재 최연소자였다. 너무 잘나가면 질시가 많기 마련이다. 문화재청이 결자해지를 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고자세다. 정말 기분 좋았지만 쓰라렸던 것이 무형문화재다. 

▲ 허길량 장인의 목조각 작품들

앞서 말한대로 조각이 ‘밥벌이’가 안되다보니 배우려는 이들이 없다. ‘밥벌이’가 되게 하려면?

밥벌이 할 수 있게 기술을 가르쳐야하고 장인들이 그 기술을 가르쳐야한다. 정말 전통공예에 관심을 안 가지면 명맥이 끊어진다. 그 시간이 멀지 않았다. 정부에서 관심을 가져줘야한다.

지금 수요가 줄고 있는게 사실이지만 앞으로 기계화 시대가 온다면 오히려 괜찮아질 수 있다. 로봇이 일을 다한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예술은 아니다. 기계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기계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수공업이 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을 거친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화도 자연스럽게 이뤄낼 수 있다.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제자들이 또 제자를 키워내지 않나. 그런 면에서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또 부탁드린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종교와 연관이 있기에 마음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앞서 말한 대안학교는 하고 싶은 생각 있다. 작은 규모라도 만들고 싶고 변상도도 꼭 만들고 싶다. 전시도 확정을 지어야한다.

요즘에는 군 부대 봉사를 많이 간다. 한 달에 한 번 일요일 종교 시간에 법당에서 장병들에게 불교 미술 특강을 한다. 스님들 이야기만 듣다가 불교 미술 이야기를 들으니까 군인들이 많이 좋아하더라(웃음). 

봉사를 하게 된 건 먼저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는 것도 좋고 이를 듣고 불교에 귀의하기를 바라는 생각도 있다. 목공에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오라고 한다(웃음). 재미있다. 그렇게 관심을 보여주니까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