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아바나의 춤, 하바네라-카르멘 조곡(Carmen suite)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아바나의 춤, 하바네라-카르멘 조곡(Carmen suite)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
  • 승인 2017.07.2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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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 메리메의 주요한 문학적 원천은 스페인과 러시아였다고 한다. 푸쉬킨을 문학적 스승으로 여겼다고 하는 메리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푸쉬킨 작품의 인물들처럼 냉혹할 만큼 강렬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메리메의 주목받지 못한 단편소설 <카르멘(1845)>의 주인공인 카르멘 역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탓에 주변 사람들을 위험으로 내모는 열정적인 인물이다. 

1876년 마드리드에 머물던 마리우스 프티파는 <카르멘>의 이야기가 발레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 1막 발레 <카르멘과 토레로>를 안무해 직접 춤추기도 했다. 하지만 발레 <카르멘>에 대중적인 관심이 모아진 것은 한참 뒤였다.

1875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오페라로 각색된 <카르멘> 초연은 의외의 실패로 끝나버린다. 비운의 여파인지 3개월 뒤에 작곡가인 비제가 37세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비제의 죽음은 지지부진한 작품의 명성을 올리는데 기여했다. 점차 오페라 <카르멘>의 인기는 높아갔고, 오늘날에도 빈번히 상연되는 인기 최고의 레파토리가 되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전 4막으로 구성되며 스페인 세비야 거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군인인 돈 호세, 담배공장 직공인 집시 카르멘, 투우사 에스카밀료가 주요 인물이다.  <카르멘>에는 주옥같은 곡들이 여럿 나온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처럼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한 불러 봐도 소용없지, 협박도 애원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가사가 붙어있는 느릿느릿하면서도 독특한 액센트가 있는 2박자 춤곡 <아바네라 Habanera>가 특히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하바네라로 알려졌으나 아바네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

▲ 돈 호세 역-알렉산더 고두노프, 카르멘 역 -마야 플리세츠카야 볼쇼이발레단,1979

쿠바의 수도는 아바나(Havana)인데, 아바나의 춤이라는 뜻의 아바네라는 쿠바에서 시작되어 스페인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유행한 곡이기도 하다. 나는 국립발레단에서 <카르멘조곡(1986)>의 카르멘 역을 맡아 춤 춘 이후 여러 번의 인연이 있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오페라나 콘서트, 갈라 및 융복합공연 등에서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춤 출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노래가 있는 음악은 오히려 춤추기가 까다롭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 2년 전 여름에는, 플라멩코의 대가 주리 선생을 찾아가 다시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 다시 한 번 배우고 싶은 열망이 샘솟는 것을 보면 <카르멘> 음악의 마력은 대단하다.

발레 <카르멘>은 1949년에 롤랑 프티가 이끌던 파리 발레단에 의해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롤랑 프티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카르멘 역의 지지 장메르는 모호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풍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내아이 같은 짧은 커트머리에 큰 입으로 활짝 웃음 짓는 순간, 마법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길고도 아름다운 다리의 선에 누구나 넋을 읽었다. 짧은 몸체에 긴 다리는 발레리나의 조건 중 첫째로 치는 장점이기도하다. 지지가 보여준 3장의 침실장면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다른 걸작 발레 <카르멘 조곡>은 1967년 러시아 무대에 등장했다.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집권하던 시절 쿠바발레단이 모스크바에 와서 공연을 했다. 볼쇼이발레단의 프리마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는 공연을 보고 직감했다.

▲ 카르멘 역-마야 플리세츠카야, 돈 호세 역 세르게이 라드첸코,볼쇼이 발레단 1970

공연이 끝나자 마야는 알롱소 부부에게 이전부터 생각했던 새로운 <카르멘>의 안무를 부탁했다. 편곡은 플리세츠카야의 남편이자 작곡가인 쉐드린이 맡아 비제 원곡이 지닌 가요성의 느낌을 현악기로, 무용성을 강조한 리듬은 타악기에 맡겨 둘의 성격을 강렬하게 대비시켰고 관악기를 배제하는 악기편성으로 음악을 완성하였다. 초연무대에서 43세의 플리세츠카야는 카르멘 역, 파데예체프는 돈 호세 역을 맡아 열연했고 곧 전 세계에 소개되며 대성공을 이루었다. 

롤랑 프티의 <카르멘>과 알롱소의 <카르멘 조곡>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언제 보아도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감수성과 함께 미세하고 상징적인 몸의 표현성에 놀라게 된다. 소설이나 오페라처럼 서사를 따라가며 줄거리를 나열해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고도로 정화된 움직임과 온 몸의 표정 연기만으로도 인물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두 발레 거장이 창조한 걸작을 기회가 될 때 꼭 감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