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비평의 窓]‘이중직 금지하자’ 논란에 코리안심포니 적임 지휘자는?
[예술가의 비평의 窓]‘이중직 금지하자’ 논란에 코리안심포니 적임 지휘자는?
  • 탁계석 평론가
  • 승인 2017.08.24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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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문체부 장관 인사 시스템 공론화부터

이중직 독식(獨食) 구조는 적폐다

▲탁계석 평론가

문제인 정부의 일성(一聲)은 일자리 창출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 역시 일자리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만큼 사회 각층의 일자리 창출은 긴박하고 절대 절명의 과제다.

연장선에 선 예술계 일자리는 더욱 심각하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예술 일자리 창출은 과연 누가 나서기라도 하는 것일까. 정책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영역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이어져 온 지휘자들의 기득권 독식 구조를 깨트려 서로 일자리를 나누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있다면 이에 충실하고 남이 할 수 있는 자리까지 겸직을 해 일자리를 독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자기가 쌓은 경력이나 권한을 이용해 넘보는 것은 이제는 막아야 한다는 담론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최근의 적폐 청산에 맞물려 새 인사 풍토를 만들려는 것과 맥이 통한다.

사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자리가 아닌 공직을 이중직으로 갖는 것은 어느 한쪽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능력있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현상은 이해하지만 독식 구조가 결국 패거리주의 산물일 것이고 다양성을 헤치며, 성장 세대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보다 전문화, 세분화의 기능을 가져야 경쟁력도 생기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 구조가 기득권 갑(甲)질로 비쳐질 수 있다.

코리안심포니

코리안심포니는 KBS, 서울시향과 다른 기능 살려야

국립오페라단 단장, 국립합창단 지휘자, 코리안심포니 지휘자에게 새로운 인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누가 될까? 설왕설래보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이런 후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이중직 문제는 고쳐져야 한다. 오케스트라의 생리상 지휘자가 다양한 경험은 갖는 것은 좋지만 ‘교직’과 ‘지휘자’ 등 다른 업종의 겸업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교수라면 ‘교수’를 보고 입학한 학생이 있는 것이고, 이럴 때 학생은 일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부실해지거나 빼앗기게 된다. 대학의 실적 평가 역시 다양화하여 학생을 잘 가르치는 것에 우선을 두어야지 연주 회수 등에 집착하는 것도 학생 중심의 교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짜고 치는 카르텔 형성이 불신을 부르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형식주의를 만든다. 단장이나 지휘자의 오디션 방식을 바꾸고 공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이를 막을 수 있다. 도종환 장관의 문체부가 인사 가이드라인부터 제시해야 옳다. 원칙과 과정, 결과에 모두가 승복하는 합리적인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 길 만이 국정농단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의 싹을 틔우는 길이지 않겠는가.

예술가 주권시대 만들려면 사회 문제 공유해야

제 집 앞 눈을 자기가 쓸지도 않고 공권력만 활용하려한다면 세상은 쉽게 혼돈을 벗어날 수가 없다. 코리안심포니에 누가 적임자인가? 그렇다면 오케스트라가 무엇을 지향한 단체인가를 정하고 지휘자를 뽑아야 한다. 그 성격과 용도에 맞는 역할로 지휘자를 찾을 때 코리안심포니의 정체성이 살아날 수 있고 여러 오케스트라 중에 하나가 아닌 캐릭터를 갖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자기 꿈을 실현하기 위한 오케스트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코리안심포니는 KBS나 서울시향이 아니어야 하고 이 길이 오케스트라가 안정화되는 길이다.

현재 거론되는 오페라하우스 통합론도 이같은 배경을 말해준다. 결국 오페라와 발레 반주를 전문으로 해야 한다면 여기에 맞는 지휘자를 찾으면 된다. 작품에 더 욕심이 있는 지휘자와는 맞지 않는다. 무대에 선 가수와 무용수를 배려하는 겸손하고 따뜻한 지휘자가 적임자다. 타협을 모르는 차가운 지휘자보다 포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설혹 그 자리에 가고 싶은 지휘자 보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도 현장에서 땀을 적신 오페라 지휘자가 더 적역(適役)이란 말이다.

촛불 시민혁명이 과거의 것을 허물고 새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예술계도 ‘예술가 주권시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 권한과 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나의 주변, 우리의 것에 관심을 갖는 인식의 변화에서 부터 서서히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