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구의 음악칼럼] 교육으로 완성된 천재성, 모차르트
[정현구의 음악칼럼] 교육으로 완성된 천재성, 모차르트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 승인 2017.09.2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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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신동 모차르트를 필두로 음악계에는 천재가 유독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음악 분야에서 신동 마케팅은 모차르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신동이 있었겠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모차르트 이후 신동은 더 다양한 모습으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뜬 1791년에 여섯 살짜리 '미스 호프만'이라는 신동이 피아노와 하프로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남동생이 케틀드럼으로 연주를 받쳐줬는데, 그의 나이는 더 놀랍게도 세 살 반이었습니다. 무치오 클레멘티라는 더 진지한 인물도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간 클레멘티는 크게 성공을 거둔 작곡가이자 최초의 진정한 피아노 거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후안 크리소토모 아리아가라는 스페인 소년도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12살에 보인 조숙함은 모차르트에 필적했으나 20살이 못 되어 세상을 떴습니다. 독일에는 놀라운 신동 펠릭스 멘델스존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보다도 다재다능했지만 개명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른들의 손에 내돌림 당하는 일을 면했습니다. 그는 여덟 살에 9번을 제외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외워서 피아노로 연주했습니다. 참고로 9번 교향곡은 아직 작곡되기 전이었습니다.

피아노 연주로 말하자면 리스트는 열 살에 같은 나이 때의 모차르트보다 훨씬 앞섰으며 12살에는 꽤 훌륭한 작곡가였습니다. 카미유 생상스는 세 살에 연주와 작곡을 했습니다. 그는 열 살에 데뷔 리사이틀을 했고 믿기는 어렵지만 앙코르 곡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32곡 중 한 곡을 임의로 선사했다고 합니다.

열거한 음악가들 외에도 많은 천재적 음악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신동으로 때어나 저절로 천재적 음악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천재적 음악가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까지는 각각의 환경에서 천재로서의 학습이 있었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여겨집니다. 높은 지성의 소유자이나 좌절한 야심가인 아버지의 지배 아래 아버지의 의도에 맞춰 성장했기에, 그의 생애는 한 독특한 천재의 발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차르트의 천재 학습을 엿보려면 먼저 아버지 레오폴트를 알아야 합니다.

레오폴트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논리학과 법학을 공부한 상당한 지성을 갖춘 문화인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 영향력 있는 바이올린 교본의 저자였습니다. 당시로서 그는 드물게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을 떠나자마자 그는 요한 밥티스트 백작 집에 악사로 들어갔고 3년 후에는 제후 겸 대주교 밑에 봉직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고용주의 괴롭힘에 시달린 끝에 궁정을 떠나 유럽의 주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부와 명성과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들과 교류하면서 재산도 좀 모으기도 합니다.

1747년에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마리아 안나 페르틀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오직 둘만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두 아이 중 맏이는 마리아 안나로, 가족들은 '난네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보다 네 해 반이 어린 동생이 볼프강 아마데우스로, 1756년 1월 27일에 태어났습니다. 그 해에 레오폴트는 바이올린 연주법에 관한 유명한 논문과 관현현악곡 <썰매 타기>를 출판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모차르트는 누나의 피아노 레슨에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누나 난네를이 자리를 뜨면 피아노는 그의 차지였습니다. 네 살에 이미 모차르트는 여러 소품을 외워서 나무랄 데 없이 연주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나지 않아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첫 작곡 결과물은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레오폴트는 자신의 발전을 희생하고 볼프강과 그의 누이 난네를의 음악 교육에 전념했는데요, 어린 모차르트가 이때 받은 철저한 훈련은 훗날 작곡 기교를 숙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가정적인 아버지였습니다. 7세의 모차르트가 하프시코드를 치고, 11세의 난네를이 악보를 보고, 레오폴트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을 담은 캬르몬텔의 그림은 자상한 가장이자 천재의 스승인 그의 인상을 잘 담고 있습니다. 

레오폴트는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1762년부터 1773년까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에 이르는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여행 덕분에 서부 유럽에서 작곡되고 들을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음악과 양식에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교향곡, 소나타, 협주곡, 실내악 그리고 오페라까지 모든 장르에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습득한 다양한 양식 덕분이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위해 봉직한 음악가였고 모차르트 자신도 그곳에서 대를 이어 악사장과 오르가니스트로 근무했기에 일찍이 그가 ‘레퀴엠’이나 ‘C단조 미사’와 같은 교회음악을 작곡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모차르트에게 아버지란 천재를 비추는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직접적인 음악교육 외에 또 다른 모차르트를 지도한 사람은 요한 제바스챤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퍼입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당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을 통한 학습을 하도록 했습니다. 즉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작곡가들이 이전에 만든 작품을 카피하고 배열을 바꾸고 따라 하면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모차르트가 21세라는 나이에 피아노 협주곡 9번을 발표할 때 그는 이미 18년 동안 전문 교사의 지도 아래 매우 엄격한 음악교육을 받아온 상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의 성공은 ‘신이 내린 재능’에 ‘지독한 노력’을 더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