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춤 사랑 열린 마당 2017’
[이근수의 무용평론]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춤 사랑 열린 마당 2017’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9.2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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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김기인이란 무용가를 기억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항상 부스스한 머리모양, 무대에 오르면 신들린 듯 춤을 추면서 자신의 춤을 ‘스스로 춤’이라 불렀던 무용가였다. 2010년 9월에 출간한 ‘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에 선정된 우리시대 무용가 30인을 가나다순으로 배열해보니 그녀의 이름이 가장 앞에 있었다. 책이 출간된 날 돌연한 부음을 들었다. 57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듬해 김기인춤문화재단이 설립되고 추모행사로 ‘춤사랑 열린마당 2011’이 처음 개최되더니 2013년 공연을 거쳐 2015년부터는 매년 기일(忌日)이면 열리고 있다. 김기인의 ‘스스로 춤’을 계승하는 제자들과 그를 기억하는 무용가들에 의해 추어지는 ‘춤 사랑 열린마당 2017, 스스로 춤-스스로 되기‘ 공연(9.2)을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보았다.

스스로 춤 모임을 대표하는 박성율은 김기인 춤의 메소드에 가장 충실한 춤꾼일 것이다. 독무인 ‘전신’과 하영미, 김수진이 함께 추는 3인무인 ‘움’에서 그들은 공연적 요소를 배제한 채 기의 흐름에만 몸을 맡기는 독특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춤은 즉흥과 다르고 소매틱스(somatics)와도 다르다. 자신의 감정과 의지가 배제된 채 기(氣)라는 보이지 않는 외부에너지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체를 벗은 근육질의 박성율은 몸의 바뀜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신(轉身)'에서 기의 흐름을 통해 바꾸는 몸의 움직임을 무술적인 투로(套路)로 보여준다. ‘움’에서는 사람들 사이로 유전하는 기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모습을 나타내려 한다. “비워낸다 끝없는 고요함 속으로 그리고 비워낸다.” 비움은 기의 흐름을 깨닫고 기를 모을 수 있는 터 밭일 것이다.

김기인이 1990년 <스스로 춤> 발표회 이후 작고하는 날까지 추고 있던 기 춤은 한국 무용계가 갖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춤이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승자들이 무대 위에서 단순한 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말고 예술적 감성을 획득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김기인과 그녀의 춤을 그리워하는 관객들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국은미는 독특한 춤 캐릭터를 간직한 무용가다. 1998년 뉴욕대학 티쉬스쿨(Tisch school of the Arts, NYU)을 졸업한 후 2002년 영상전문가인 권병철과 함께 <숨 무용단>을 창단하고 영화와 춤을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해왔다. 그녀의 춤은 소매틱스란 독특한 몸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두뇌의 지시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 대신 몸이 움직임을 시작하고 움직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몸의 움직임은 중력에 의해 영향 받고 호흡에 의해 지탱된다. 그렇게 이어지는 움직임이 주변의 소리와 환경의 변화에 감응하는 마음의 작용과 결합되면 춤이 된다는 것이 그녀의 춤 철학이다. 즉흥이 마음의 작용에 의해 몸이 움직이는 결과라는 면에서 국은미의 춤은 즉흥과 구별된다. “스스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만이 진정한 것이다”란 김기인 스스로 춤의 철학과 통하지만 외부에너지인 기가 움직임의 주체가 아니란 면에서 기 춤과도 다르다.

한예종 출신의 김동현, 신상미와 함께 국은미가 보여준 춤은 <하나 둘 셋>이다. 혼자가 아닌 세 사람이 자신의 몸의 지시에 따라 형성해가는 구도는 평면 위에 펼쳐진 입체적인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은정의 ‘채움’이 장식한다. 그녀가 올 4월에 시작한 솔로 3부작 <되기, 되기, 되기>의 마지막 버전이 ‘채움‘이다. 장은정의 <되기> 시리즈는 몸이 어떻게 춤이 되고 어떻게 완성되어가는 가를 보여주는 철저한 몸의 탐구 작업이다. 현대춤작가 12인전(4.4~9, 아르코대극장)에 처음 선을 보였던 <앎>에서 자신의 몸을 알기 위한 과감한 나신을 공개했던 그녀다. 그 때와 같이 무대에 정사각형의 흰 색 작은 공간 두 개가 비스듬히 마련되어 있고 그 한 쪽 공간에 크고 작은 북이 놓여 있다.

텅 빈 공간을 소리로 채우려는 듯 요란한 북소리로 공연이 시작된다. 다른 한 쪽 공간에서 온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워있던 여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붉은 색 헐렁한 자루 옷이 곧 벗겨질 듯 위태롭다. 첫 번 째 <앎>에 이은 두 번 째 작품인 <비움>(5.15, 제주돌문화공원)을 통해 비워졌던 몸을 새로운 몸으로 되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분해된 몸의 부분과 부분을 연결하고 끊어진 숨과 몸을 연결하면 잊혔던 기억들도 되살아난다.

50대에 들어선 완숙한 몸에 춤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섞어 완성한 장은정의 예술성이 김기인 식 기 춤과 결합되어 오래도록 진한 여운을 남겨준다. 언젠가 <앎> <비움> <채움>으로 구성된 <되기>시리즈 전 작품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