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석의 비평의 窓] '오페라 윤이상'으로 보여주려는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노력
[탁계석의 비평의 窓] '오페라 윤이상'으로 보여주려는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노력
  • 탁계석 평론가
  • 승인 2017.10.2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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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오페라 '나비의 꿈' 공연, 정부 우리 오페라에 의지를 가지고 지원해야
▲ 탁계석 평론가

예술가가 시대와 무관한 삶을 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면 그 행위는 재현(再現)에 귀납될 수밖에 없다. 연주가들이 고전(古典)과 낭만을 연주하고 , 오페라가수가 익숙한 레퍼토리 몇 개로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풍토에서 예술의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만약에 화가가 지난 화풍(畵風)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어찌될까? 작가가 세익스피어를 그대로 옮기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 정신이 가장 박약한 곳이 클래식계가 아닐까 싶다. 이런 작가 정신의 부재가 우리 클래식계가 창작과 연주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하고 있다. 어느 한쪽만의 짝사랑으론 불이 붙을 수 없는 것이기에 창작에 대한 서로의 불꽃 튀기기가 오늘 우리 음악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장수동 감독이 창작 오페라에 몰입하는 것은 오랜 경험이 만든 그의 통찰일 것이다. 왜? 이토록 창작인가? 그 해답은 재현만 하는 레퍼토리 반복이 매너리즘이고, 매너리즘은 결국 예술의 무덤인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울오페라앙상블은 2년 전 이근형의 <운영>, 올해 5월 고태암의 <붉은 자화상>을 무대에 올렸다, 일생 오페라단 운영하면서 창작오페라 한편 제작하지 못한 단체가 적지 않을 것인 바. 그의 초월적 의지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언젠가 충무로에서 영화에 대한 담론이 난무한 자리에서 어느 감독이 입으로 영화를 풀어내는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 영화 찍어 봤어!’  이 한마디에 그 이론가는 뻘줌해져 얼굴이 빨개졌던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창작의 어려움을 논하면서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가 어렴풋이 알 수는 있겠지만 체감하는 것은 이처럼 다르다는 것이다.

창작이 살아야 문화가 꽃 핀다

윤이상 선생 100주년을 문화계가 모르진 않겠지만 장 감독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페라 윤이상’이었다.

윤이상기념사업회 기금이 짤렸다가 다시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지원되는 등 혼돈을 겪을 정도로 그의 사상과 정치에 대해 완전히 풀려진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진실과 세계적 작곡가를 대하는 고향의 입장에는 여전히 온도차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는 이번 오페라 창작 노트에 “ 동서양, 남북의 경계에서 분단과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평화를 추구하며, 작곡 혼을 불살랐던 윤이상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오페라 <나비의 꿈>을 올린다“고 했다. 일반 관객들이 윤이상 선생의 스트리를 소상하게 알 수 없기에 이 한 편 오페라를 통해 승화된 작가의 내면과 옥고를 치르면서 겪었던 세찬 풍파의 시간을 비쳐낼 것 같다.

그는 “부당한 국가권력의 횡포 속에서의 오페라 집필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일체의 이념, 용공시비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의 음악세계와 분단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의 관객과의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 오페라 작업을 한다고 했다.

필자 역시 기억나는 것은 윤이상 선생이 일본에서 통영을 바라보며 고향 방문을 그토록 희망했지만 정부가 인정하지 않았을 때에 예술평론가들이 상을 준 것이다. 용기가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서울오페라앙상블 창작오페라 <나비의 꿈>

‘나비의 꿈’ 오페라는 조국 고향에서의 대접

이번 서울오페라앙상블의 <나비의 꿈>은 창작자에게는 더없이 꿈틀거리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장 감독이 젊은 작곡가들에게 창작 기회를 주고 이들의 작품을 통해 창작 오페라의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 것은 국,공립 단체의 것보다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년이면 오페라 70주년이다. 마음 한 켠에 부끄러운 것이 바로 ‘창작’이다. 성악가들은 훌륭하게 만들어졌다지만 이들이 자기의 주 레퍼토리로 활용하면서 세계 시장을 개척할 레퍼토리가 얼마나 있는가? 문화부나 정부의 인식은 어디까지 와있는가? 창작시스템 부재가 오늘의 미숙한 오페라 환경을 말해주고 있다.

‘창작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는 지극히 당연한 목표가 작가 정신의 부재(不在)와 이를 뒷받침할 마인드 부재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영화계는 한국영화가 허리우드 영화를 뛰어 넘은지 오래지 않은가. 스크린 쿼터를 줄기차게 밀고 나간 효과가 나타난 것이고 충분한 내수 시장으로 관객 기반을 확보한 영화의 경쟁력은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이를 벤치마킹 하듯 우리 오페라에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지원한다면 콩쿠르를 석권한 성악가들이 글로벌 오페라 시장을 충분히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앞다투어 오페라 예산 주려는 기업과 시민이 있는 나라

몇 해 전에 이태리 라 스칼라에 경영난이 덮쳐 어려움을 겪자 이곳의 한 기업이 우리 돈 270억원을 쾌척한 뉴스를 보았다.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는 바그너 탄생을 기념해 예산이 부족하자 플라시도 도밍고가 시(市)에 지불보증을 요청했지만 시민들이 자존심이 상한다며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어 성공시킨 사례마저 있다. 참으로 꿈같은 이야기다.

이처럼 왜 선진국들은 경제성도 없는 오페라에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 상드리에 화려한 조명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전쟁 중에도 오페라하우스를 지켰을까? 지난해에 조성진 쇼팽 콩쿠르에 이어 올해는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선우예권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분명히 우리는 클래식 강국이다. 성악가들이 콩쿠르에서 수상을 하고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에 서는 것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페라나 클래식을 다루는 전문부서 하나가 없다. 전통예술과(?)가 전부요 그것도 비전문가가 오페라를 다룬다.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 정부에 묻고 싶고, 시인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다. 영부인께서 윤이상 선생의 베를린 묘지에 나무를 심은 것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시대의 갈등을 넘어서 새로운 평화 지도를 그려야 하는 오늘에서 이 오페라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떤 젊은 작곡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페라가 안되는 나라치고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꼴을 못보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