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끝난후 ? 보졸레 누보
축제가 끝난후 ? 보졸레 누보
  • 박주협 와인컬럼니스트
  • 승인 2008.12.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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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컬럼니스트 박주협

 2000년 이후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이 자기 생일처럼 기억하기도 하는 11월 셋째주 목요일, 보졸레 누보가 출시되는 날이다.

누보(Nouveau)라는 와인은 보졸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루아르(Loire)지역의 앙주(Anjou) 를 비롯해 제법 많은 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와인인데 보졸레에서만 만드는 걸로 잘못 알려져 있다.

▲ 와인컬럼니스트 박주협
누보 또는 프리머(Primeur)라 불리는 햇와인은 주로 과일맛이 두드러진 품종으로 양조해 11월 15일부터 소비할 수가 있다. 보졸레 누보의 출시일은 보졸레에서 정한 날짜일 뿐이다.

보졸레 누보의 성공엔 죠르쥬 뒤버프(George Duboeuf)같은 큰 네고시앙들의 역할이 컸다. 자기 밭은 거의 없었지만 50년대 이후 늘어난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많은 양의 싼 포도를 사들여 보졸레 누보를 전세계에 유통시킨 장본인들이며, 현재도 보졸레 전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포도를 사들여 와인을 만들고 있다.

현실을 들여다 보면 보졸레 지역엔 이런 네고시앙들 덕에 버티고 있는 집들이 많다. 게다가 점점 네고시앙으로 넘기는 양이 많아지고 있다.

보졸레 누보가 새로운 시장인 태국이나 동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판매율이 높아지고는 있다지만, 누보는 축제의 와인이다. 축제가 끝나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그런 와인이다. 역시, 다른 지역처럼 소비감소는 시간문제인 것이다.

보졸레의 다른 와인들은 보졸레 누보의 인기를 타고 세계인들에게 더불어 잘 알려졌을까? 글쎄? 보졸레 누보는 오히려 다른 보졸레의 와인들에게 폐만 끼친것 같다는 생각이다. 갸메로 만들면 축제 기분에 마실만은 해도 사서 재어두고 마실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버린 건 아닐까?

보졸레의 품종, 갸메(Gamay)는 부르고뉴의 공작 필립 르 하디 (Philippe le Hardi, 1342-1404) 에게 천대를 받아 보졸레로 귀향을 오게 됐지만 결코 만만한 품종이 아니다.

물랑아방(Moulin-A-Vent), 모공(Morgon)같은 10개의 CRUS(크뤼, 특정밭을 일컬음)들을 마셔보면 알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모메상의 1978년산 Morgon의 충격적인 기억은 아직도 어젯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이제는 모두가 화려한 축제의 꿈에서 깨어야 할 때이다. 보졸레의 도멘들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갸메의 특성과 보졸레의 토양이 잘 어우러진 와인으로 승부를 해야 할 것이다. 점차 자기 와인의 비율을 높여 가면서 품질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수밖엔 길이 없다.

지난 가을 들렀던 모공의 한 유명한 도멘, 시음을 끝내고 돌아서는 내게 주인은 내년엔 포도밭을 갈아엎고 옥수수를 심을 거라고 했다. 답답한 심정이야 그 사람만 할까마는, 내 가슴 한 켠에서도 뭔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 했던가.
때로는 날카로운 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 동식물을 말려 죽이고 사람을 병들게도 한다.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시대엔 마케팅이란 무기로 빛을 만들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 그늘진 곳에서 빛을 찾아다니란 얘기가 아니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직접 마셔보지 않은 와인을 남의 얘기를 듣고, 글을 보고 미리 속단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 뿐이다.

박주협 (와인칼럼니스트)
1971년 울산 출생.
2001년 1월, ‘칼바람 맞으며’ 프랑스로 건너가 지금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부르고뉴 본(Beaune)에서 살고 있다. 애초 사진 공부하러 갔다가 취미로 친구들과 시작한 와인모임때문에 와인에 발을 들이게 되었단다. 2004년 디종으로 이사, 부르고뉴 대학에서 포도재배, 양조, 토양학에 관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2006년 본에 있는 CFPPA에서 소믈리에 학위(BP Sommelier)를 따고, 본에 있는 Le Jardin des Rempart라는 레스토랑에서 쉐프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