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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의 무용평론] 전미숙이 보여준 근래의 수작 ‘BOW'
2017년 10월 27일 (금) 14:03:14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sctoday@hanmail.net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허공처럼 텅 비어 있는 벽면을 옆에 두고 한 남자가 바닥에 앉아 있다. 얼굴엔 가면을 쓰고 단정하게 무릎 꿇은 자세다. 그의 앞에 깔린 돗자리 위에 찻잔 하나가 놓여 있다.

무대 뒤에서 두 손에 차관(茶罐)을 받쳐 든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빈 잔에 차를 따른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남자가 찻잔을 들어 올려 반 쯤 비운 후 자리에 내려놓는다. 남은 잔을 모두 비운 여인이 일어서서 자리를 둘둘 말아 접고는 머리에 이고 사라진다.

전미숙이 ‘BOW'(2017, 9,9~10, 대학로예술대극장)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첫 장면이다. 찻잔은 전미숙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소도구다. ’죽도록 사랑해(Sinno me moro)’의 노랫말을 배경음악으로 했던 2015년 작품인 <Amore Amore Mio>에서 두 손에 찻잔을 받쳐 든 여인이 무대 가운데 서있는 남성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장면이 오버랩 된다. 찻잔을 받쳐 든 신중하고 유연한 걸음걸이를 통해 깨지기 쉬운 사랑의 속성과 첫 만남의 망설임을 표현하면서 전미숙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뒤의 벽면 색깔이 주홍색으로 변한다. 무용수들이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등장한다. 네 쌍의 남녀가 서로에게 머리 숙여 정중한 절을 나누고 군무가 시작된다. 현대무용 판 부채춤이다. 벽면의 색깔은 황색으로, 보라색으로, 다시 엷은 녹색으로 계속 변한다. 조명이 무대 바닥을 붉은 색으로 물들인다.

남녀공용으로 입고 있던 청보라 색 바지 색깔도 어느새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팔색조처럼 자유자재로 변모하는 전미숙의 색채감각은 아마도 국내최고일 것이다. 여인들의 머리에 얹혀있는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발걸음이 고요해야 한다. 찻잔은 커다란 대접으로 바뀌어 있다. 바닥엔 다시 자리가 깔리고 그들은 관객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쉬지 않고 절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절이 진심일까. 깊이 머리 숙인 얼굴엔 미소가 어리기도 하고 무표정일 때도 있고 어느 때는 비웃는 듯 희미한 냉소도 띄어 있다. 풍부한 움직임과 표정의 다양함이 전미숙 춤의 캐릭터라면 그 표정의 변화를 통해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드러내려는 것은 이 작품의 한 가지 의도일지 모른다.

작품엔 다양한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돗자리, 찻잔, 대접, 부채, 가면 등,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낯익은 도구들이다. “이 작품이 바라봄만으로도 평온함을 주고 상상의 폭과 생각의 물길을 열기를 희망합니다.” 전미숙의 표현대로 진심에 공감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된 소도구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편안해하면서도 빠른 장면전환과 절도 있는 동작을 통해 작품에 변화와 재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순함과 복잡함의 공존이라 할까. 김재덕의 음악은 무난하고 이태양의 무대미술은 전미숙의 색감을 잘 살려낸다. ‘소무’(김보라)와 “Fake Diamond'(차진엽)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허풍스런 의상은 이 작품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상체의 굴곡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몸에 착 달라붙는 고동색상의와 일본 식 몸 빼 바지처럼 엉덩이가 부풀어진 청보라색 하의는 색의 대비도 그렇지만 상하의 부조화가 드러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작품의 흐름과 일치하는지 의문이다. 독일 인터내셔널 탄츠메세(Tanzmesse) 'Bow' 공연에 출연한 윤나라, 이지윤, 한윤주, 송승욱, 영국 아크람 칸 무용단에서 춤춘 임샛별, 그리고 안남근, 이주희, 양지연 등 쟁쟁한 무용수들의 기량은 작품 전편을 통해 돋보였다.

‘Amore Amore Mio’가 전미숙의 2년 전 마음이었다면 ’BOW‘는 손 떨리는 사랑의 전율과 미지를 향한 조바심 대신 “삶에 대한 감사와 덜어냄의 미학을 절실히 느끼며 모자라지만 비워내면서 세상에 내어놓는” 전미숙의 현재의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계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창작적 억압에서 벗어나 얼마간 지친 상태에서 자신의 모습과 주변을 관조할 때 새로운 것이 보이는 법, 욕심이 비워진 작품의 진정성에 관객들은 공감한다.

2014년 말레이시아 타리댄스페스티벌에서 초연하고 2016년 서울 아트마켓을 통해 국내에 처음 선 보인 ‘BOW'는 60분으로 확장된 이번 공연을 통해 전미숙 자신의 춤 색깔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다. 근래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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