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과 선으로 음악가 없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정기호 화가
색과 선으로 음악가 없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정기호 화가
  • 정영신 기자
  • 승인 2017.10.28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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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보고사’에서 가을소풍, 가을소품전이 지난 25일부터 열려

현실과 상상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의 삶과 상상의 경계에 서있는 재불화가 정기호선생의 가을소풍, 가을소품전이 지난 25일 갤러리 ‘보고사’에서 열렸다. ‘나의 스승은 톨스토이’라고 말하는 그는 소설가가 되려면 한단어로 열가지 이상을 표현하듯, 화가는 누드를 통해 선을 긋고, 색을 칠함으로써 자기 색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 캔버스 위에 유채 size 300x240 1990 Ⓒ정영신

이날 전시장에는 노환으로 나오지 못한 화가 정기호를 발굴해 파리까지 보낸 박인식씨가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는 한때 정기호선생 그림에 미쳐 알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호소해 파리에 터까지 잡아주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소설가 박인식씨와 40여년의 인연이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화가의 아내 조경석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종이에 수채 size 300x400 1971 Ⓒ정영신

그의 아내 조경석씨는 처녀시절 잘 아는 약국에서 정기호가 그린 그림에 감동해, 그날로 그림의 주인을 찾아내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그림을 위해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금껏 남편뒷바라지는 물론 그의 작품에만 평생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 그림을 보면서 감동하고 남편과 같은 꿈을 담아가고 있다.

▲ 종이에 수채 size 300x400 1972 Ⓒ정영신

정기호선생은 그림에 미쳐있다. 남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상관없이,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열정과 광기에 사로잡힌 채 성실한 노동자처럼 매일 선을 그린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미쳐 아침9시부터 시작한 그림을 다음날 새벽 5시까지 3개월 동안 그리다 눈이 실명이 될 정도로 그림에 미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그 어떤 계획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기호선생이 작업해놓은 그림 양을 보면 조선최고의 다독가 김득신이 생각난다. 김득신은 ‘사기’의 ‘백이전’을 11만 3천번 읽었다. 거기에 1만번 읽은책이 36권이라니 김득신 또한 병적인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의 책을 10만 번째까지 읽었다는 횟수를 셀 수가 있겠는가.

정기호선생도 자신이 미대를 나오지 않아 도서관에 들어가 미학 책을 집어 삼키듯이 읽으면서 책을 모조리 외웠다고 한다. 예술이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면 성실함이 예술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종이에 유채 size 500x700 2007 Ⓒ정영신

프랑스평론가 Cerard Xuriguera는 정기호의 예술과 해학의 연주 서문에 “육신의 파편, 삼각형으로 축소된 얼굴, 돌출된 식물, 선회하는 꽃잎, 광란적인 풀, 그리고 여행하는 별과 바다 냄새들로 칠보 장식을 한 유희적 악보 속에서 모두가 동시녹음 되어 있다.

또한 깊숙이 묻어둔 감정들을 화폭에 육화시키는 기억의 수호자로서, 몽상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탈출을 통합하는 주관성의 흐름에 그 영향력을 조율하고 있다. 이 놀라운 세계의 작가이자 배우인 정기호는 이 모든 구성 너머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낙천적인 시각의 생기를 퍼뜨리고 있다”고 평했다.

▲ 종이에 유채 size 455x530 1980 Ⓒ정영신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흡이다. 매일매일 에스키스를 수없이 그리는 것도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수련이자 명상이다. ‘나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정기호선생은 삶이 곧 그림이자 그림이 그의 삶이다. 그는 현실의 감정을 단단히 붙잡아 그만의 넓은 세계관과 깊은 사유를 중심축으로 기발한 상상 속에서, 현실에 대한 물음을 비유와 은유를 통해 유머스럽게 또는 어린왕자처럼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를 그림으로만 펼쳐 보인다.

▲ 종이에 유채 size 390x220 1989 Ⓒ정영신

미술평론가이자 경희대석좌교수인 윤범모는 “정기호 세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기존 미술동네의 관행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틀에 박힌 제도 교육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입장이다. 엉성한 듯하면서 뭔가 짜임새가 있는 것 같은 것,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아쉽게 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음미를 요구하는 세계이다.

그의 작품에서 피카소를 , 마티스를, 샤갈을, 호안미로를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딱히 그들 특정 작가와 대입하여 영향관계를 논하기에는 뭔가 다른 독자성을 놓치지 않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향하는 세계의 목표가 다르다는 점이다.”고 서문에 썼다.

▲ 정기호 화가 (사지제공 : 조경석)

또한 정기호선생을 위한 문화집단 ‘기호’가 지난해 만들어졌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교육과 보육의 기회를 제공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문화집단 ‘기호’는 인하대학 연극영화학교수 노철환씨가 만든 것이다. 정기호선생의 삶과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와 출판, 공연, 영상, 교육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 박인식 소설가 Ⓒ정영신

2014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정기호화가의 ‘그 곳 풍경, 여인’전을 기획했던 김현숙씨는 “벽에 걸어놓은 정기호선생 그림이 말을 걸어와 전시기획까지 하게 되었다면서, 특히 그의 검푸른 바다 절벽과 그 아래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의 흔적을 보면서, 그의 예술적 표현능력과 내적 경험에서 오는 그의 굴곡진 삶과 열정의 에너지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과 마주치면 그의 삶이 고스란히 내게 전이되어, 나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고 했다.

정기호의 가을소풍, 가을소품전은 문화집단 ‘기호’의 후원으로 10월 31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보고사’에서 열린다. (전시문의 : 02-722-3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