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음악극 ‘적로’의 실존인물 박종기 명인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음악극 ‘적로’의 실존인물 박종기 명인께
  • 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7.10.2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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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박종기(朴鍾基,1879~1941)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공연됩니다. ‘적로’라는 작품으로, 배삼식 작, 최우정 음악, 정영두 연출입니다.

제가 선생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5년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 “朝鮮人物事典”(1995. 5. 5. 大和書房)이 출판됐지요. 저는 한국의 전통예술과 관련해서, 어떤 분을 다뤘을까 궁금했습니다. 모두 예상대로였지만, 한 사람만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 때 내가 알고 있는 박종기는 ‘전라도 진도출신’으로, ‘대금산조의 창시자’가 전부였습니다. 그 외에는 더 알려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나온 ‘조선인물사전’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박종기’ 항목을 집필한 ‘야스다 히로미’는 박종기란 인물에 대해 참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절로 반성하게 되더군요. 일본에서 나온 책과 일본인이 쓴 글이 ‘박종기’를 ‘한국’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화가 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당신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됐었지요.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제가 1930년대의 조선문화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로 경성방송국(JODK)의 국악프로그램의 레퍼토리와 출연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박종기라는 인물이 더욱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런 과정에서 앞서 일본인이 쓴 박종기에 관한 내용에도 고쳐야할 내용이 있고, 한국에서 나온 책에서도 다루지 못한 당신의 ‘본질적인 성향’과 ‘총체적인 모습’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전라도 무가(巫歌)출신의 당신이 경성에 올라온 것은 1928년이더군요. 앞의 책에 적혀있는 것처럼 1930년이 아니라, 이보다 2년쯤 빠른 1928년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당신은 서서히 경성방송국에 출연을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선생님께 ‘대금’을 맡기진 않았습니다. 고수(鼓手)로서 자리를 잡게 되자, 서서히 대금의 기회가 온 것이지요. 당시 경성방송국의 청취자는 당신을 통해서 ‘봉장취’라는 음악을 알게 되고, 또한 대금에서도 ‘산조’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음악극 ‘적로’에는 박종기와 김계선이 주인공입니다. 당신들은 ‘조선음률협회’에서 서로 만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울러 콜롬비아레코드의 녹음을 통해서도 친분을 쌓았겠지요. 전라도 단골(무당) 출신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당신이, 경성에 올라와서 대금과 장구를 통해서 당대의 명기명창(名妓名唱)들의 반주를 맡게 되고, 드디어 당신이 꿈에 그리던 대금을 중심으로 한 음악들이 크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늘 선생님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많습니다. 특히 1936년 1월 1일, 박종기선생님께선 어떻게 하루를 지냈을까? 특히 궁금한 날입니다. 새해를 맞아서, 이 날도 선생님께선 경성방송국에 출연을 했습니다. JODK 경성방송국에선, 새해 아침 8시 30분, 기미가요(君ガ代)부터 시작했습니다. 새해의 첫날, 일본 국가(國歌)가 경성방송국을 통해 조선 땅에도 울려 퍼진 거죠.

오전 9시, 세모제(歲暮祭) 실황(實況)이 조선신궁(朝鮮神宮) 앞 광장으로부터 중계를 합니다. 조선신궁은 남산자락 회현동에 세워졌죠. 일제가 한양도성의 일부를 허물고, 거기에 지은 건물이 조선신궁입니다. 오후에는 설날을 맞아서, 옛 얘기(古談), 클래식 레코드 감상시간, 새해를 맞는 방담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방송국사람들이 가장 긴장하고 치중한 건, 결국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신년사(新年辭)였겠죠. 조선총독은 오후 6시쯤, 경성중앙방송국(경성부 정동 1번지 소재)에 도착을 했을 겁니다.

오후 8시에 출연을 하는 선생님은 그 때 경성방송국에 도착을 했을까요? 아니면, 방송국 측에서 총독각하의 신년사 연설이 끝난 후에 방송국 출입이 가능하다고 했을까요? 선생께서는 어쩌면 그 근처의 다방이나 카페에 계셨을 것 같습니다. 늘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연주를 했던 선생님이니, 일찍부터 근처에서 술 한 잔 하셨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6시 25분, 조선총독의 신년사 연설이 시작됐습니다. 제6대 조선총독 宇垣 一成 (우가키 카즈시게)의 일본어가 조선땅에 울려퍼졌겠죠.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못 알아듣고, 누구는 울분의 심정으로, 누구는 애써 무시하는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JODK 직원들은 신년사 방송을 잘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겁니다.

7시 30분, 드디어 음악을 들을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조선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순서는 가곡(歌曲)으로 하규일(河圭一)과 김초홍(金焦紅)의 남녀창이었습니다. 방송의 하이라이트는, 당신이 출연했던 8시입니다.

‘가야금병창’으로 처음 단가를 부른 후에, 이어서 창극조(판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권번출신의 기생 김해선이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고, 당신이  대금을, 지용구가 고수를 맡았습니다. 경기도 수원 출신의 지용구와 전라도 진도 출신의 박종기, 두 사람은 참 그 시절 음악적으로 통하는 콤비였던 것 같습니다.

새해 첫날 생방송을 마친 후, 당신은 지용구와 함께 당시 경성방송국이 있는 인사동 근처 어느 주점에서 탁주 한 사발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1937년 6월 3일 오후 21:20, 경성방송국에선 선생님이 대금으로 연주하는 ‘봉작가(鳳雀歌)’가 방송이 되었지요. “대금 박종기, 장구 지용구” 이름이 참 반가웠습니다. 봉작가는 ‘봉장취’라고도 하는 음악으로, 새소리가 이 음악에선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 국악계에서 ‘봉장취’가 대금산조의 전신(前身)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당시엔 두 음악이 별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음악극 ‘적로’를 계기로 해서, 우리가 박종기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고, 또한 당신을 통해서 1930년의 조선악(국악)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국악사의 한 켠에 묵묵히 존재하는 박종기를 불러내서,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내려는 돈화문국악당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 음악극 ‘적로’, 2017. 11. 03. ~24. 서울돈화문국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