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Coulmn]바흐의 칸타타
[Music Coulmn]바흐의 칸타타
  • 정현구 ‘코리아네오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드림
  • 승인 2017.10.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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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네오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드림가디언즈 이사장’

독일의 음악은 바흐의 칸타타 없이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각지의 교회에서 주말에 개최되면서 거의 무료인 교회음악회는 지방의 합창단이나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독주자나 독창자로 등장하여 프로 연주자들과 함께 바흐의 칸타타를 중심으로 한 종교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연주회가 셀 수 없이 열리고, 이러한 음악을 사랑하는 일반 대중들이 만원을 이루는 상태가 계속되는 독일은 진정한 음악의 나라이다.

이러한 상황은 바흐가 활동했던 18세기 전반에도 있었다. 물론 당시 바흐의 칸타타는 오늘날과 같이 연주회에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과 중요한 축일을 위한 예배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당시의 예배의식을 장식하는 바흐의 칸타타는 신앙심이 깊은 라이프치의 시민들에게는 상당한 매력이었으며, 따라서 그 작품의 내용과 연주는 그들의 중요한 화제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군주였던 작센선제후 등의 생일이나 성명축일, 그리고 대관을 축하하기 위해서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당시 라이프치히에서 유행하였던 카페하우스에서는 바흐의 지휘로 콜레지움 무지쿰이 협주곡이나 관현악곡뿐만 아니라 칸타타도 연주하였다.

이렇게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칸타타를 '세속 칸타타'라고 불렀으며, 가사가 다른 점과 당시 코랄이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을 제외하면 음악적으로 '교회 칸타타'와 큰 차이는 없다. 사실, 바흐는 많은 수의 '세속 칸타타'를 개작하고 새로운 가사를 붙임으로써 '교회 칸타타'로 만든 작품들도 많았다. 이러한 작곡법을 음악학에서는 '바흐의 패러디 기법'이라고 부른다.

모리츠 하우프트만(Moritz Hauptmann, 1792-1868)은 멘델스존과 함께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과 함께 ‘구 바흐 전집’의 간행을 주창하였으며, 바흐협회를 세운 바흐 르네상스의 공헌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1857년 모차르트의 전기 작가로 유명한 오토 안(Otto Jan, 1813-1869)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흐의 칸타타 형식을 여러 모양의 열차로 비유했다.

하우프트만에 의하면 거의 모든 바흐의 칸타타는 대규모 도입합창의 기관차가 몇 개의 에치타티보와 아리아라는 객차를 이끌고 마지막 꼬리에는 코랄이라는 우편열차를 달고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 비유의 중심은 도입합창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도입합창에는 모든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비발디스러운 ‘합주의 원리’를 화려하게 전개하고 저기에 이른바 ‘독주군’으로 등장하는 합창은 때에 따라서 코랄을 정선율로 하는 ‘코랄 편곡’형태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다른 때에는 엄밀한 ‘순열푸가(Permutationsfuge)’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물론 여러 모양으로 변한다. 도입합창 앞에 기악만으로 이루어진 신포니아가 오는 경우도 있도, 아리아는 독창 아리아에 한정되지 않고 2중창이나 4중창까지 확대되는 경우도 있다.

작품의 끝을 장식하는 코랄도 간단한 4성부이고, 기악도 거의 동일한 움직임(colla parte)으로 반주되는 작품부터 화려한 오케스트라를 반주로 하고 있는 작품까지 천차만별이다. 레치타치보는 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세코’와 기악반주를 동반한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 등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른바 이탈리아적 형식원리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의 전통적인 수법을 교묘하게 융합하는 것에 성공한 도입합창의 독자적인 형식이야말로 음악사상 바흐 칸타타의 최대 공헌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바흐의 개인적 신념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그의 칸타타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칸타타(Cantata)’라는 단어는 교회 목사이자 시인이었던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 1671-1756)가 루터 교회의 음악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하였는데 바흐는 수많은 그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

칸타타는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이면서 전혀 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윤리위원회들도 칸타타의 공연을 허용하였다.

이들 칸타타들은 거의 항상 성경 그대로의 가사를 사용했던 쉬츠의 음악과 같은 초기 루터교 음악으로부터 굉장히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성경으로부터의 이탈은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흐가 그의 칸타타에 사용한 언어는 너무도 훌륭한 것이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탁월한 작품들로 남아 있다.

바흐는 다른 어떤 형식보다도 칸타타에 그의 창조적 능력을 많이 쏟아 부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5년 주기의 칸타타를 완성하였다. 즉 5년 동안 매주일과 성일에 새로운 칸타타가 공연되도록 작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작곡한 300여 편의 칸타타들 중에서 지금은 200여 편이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정통 루터교의 요청에 의하여 창작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에 대한 경건주의자들의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독특한 기독교 음악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