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비판? 팝아트? 그냥 내 맘대로 작업하는 '예술가'야!"
"사회 비판? 팝아트? 그냥 내 맘대로 작업하는 '예술가'야!"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11.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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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리처드 해밀턴:연속적 강박', 광범위한 소재로 만들어낸 '반복과 재해석'

같은 소재, 같은 사진이다. 하지만 이를 보며 느끼는 사람들의 생각은 각각 다르다. 심지어 나 자신도 하나의 소재를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A가 중심으로 보이는데 갑자기 B가 중심으로 보일 때가 있다. '요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저렇게? 아님 이렇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 생각을 수십년 동안 작품을 통해 반복하며 새로움을 창조해갔던 한 작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가의 작품이 이제 우리에게 선을 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3일부터 열리는 '리처드 해밀턴:연속적 강박'은 팝아트의 기원을 일구며 '영국 팝아트의 거장'으로 불리는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며 또한 리처드 해밀턴의 사후 전시 중 가장 큰 규모의 전시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 $he, 1958-61, Oil paint, cellulose nitrate paint, paper and plastic on wood, 122x81cm, Tate Purchased 1970
▲ $he, 1982, Collotype and screenprint,25 x 17 cm (sheet),Hamilton Estate

팝아트라면 우리는 흔히 1960년대 미국 팝아트를 이끈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생각하지만 영국에서는 2차대전 후 소비주의 사회의 등장과 함께 이미 50년대부터 팝아트가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을 이끈 이가 리처드 해밀턴이었다.

50년대 후반에 발표한 회화 연작 <그녀($he)>는 잡지의 광고 이미지를 활용했다. 진공청소기와 냉장고 같은 현대식 가전제품과 '에스콰이어'지에 수록된 여배우 비키 더건의 핀업 사진을 조합한 이 연작은 이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소비주의 욕구의 기계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는 제목 <$he>에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이미 다 표현했다. 

해밀턴의 판화 <토스터> 시리즈는 1960년대 독일 브라운사의 디자인 수장이었던 디터 람스가 작업하고 개발했던 디자인과 전자제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상단에 표기된 '브라운'을 마치 자신의 이름처럼 대체하는 <토스터>는 토스터가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모습으로 연작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40년이 지난 후에는 <토스터 딜럭스>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토스터가 놓여진 곳에는 관람객의 얼굴이 비친다. 거울이다. 그 토스터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소비 사회에 찌들어진 내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놀랍다.

▲ Swingeing London 67 (f), 1968-69, Acrylic paint, screenprint, paper, aluminium and metalised acetate on canvas, 67 x 85 cm, Tate Purchased 1969
▲ Swingeing London 67 (d), 1968-69, Oil on canvas, 67.31 x 84.46 cm, Modern Art Museum of Fort Worth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윙징 런던>이 있다. 1967년 팝 가수 믹 재거와 당대 유명한 화상이었던 로버트 프레이저가 불법 약물 소지죄로 체포되어 법원에 호송된다. 카메라가 다가오자 이들은 모두 얼굴을 가렸고 이는 곧 신문에 나왔다.

믹 재거가 눈을 가리려고 손을 올리자 같은 수갑을 차고 있던 프레이저의 손이 같이 올라가게 되는 긴박한 순간이 담긴 한 사람의 사진을 해밀턴은 다른 방법으로 재현하고 또 재현한다.

페인팅으로, 드로잉으로, 동판화로, 실크스크린으로, 아크릴로 계속 반복해서 표현되고 수갑이 강조되는 작품, 손바닥이 강조되는 작품 등으로 또 반복된다. 하나의 사진을 다양한 방법으로 수십년간 반복해서 표현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작품의 의미는 계속해서 지속된다.

해밀턴의 작품 세계가 축약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그처럼 반복을 거듭하지만 그 반복을 '새로운 창조'의 도구로 여긴다. '반복과 재해석' 해밀턴의 미술 인생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회화의 전통적 소재인 꽃의 감상적인 클리셰를 깨고 자신의 얼굴 사진에 물감을 뿌린 것을 '자화상'이라고 보여주는 그는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무장단체 수감자들이 수용된 모습을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표현한 <시민> 연작, 자신의 방을 갤러리처럼 꾸미며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일곱개의 방> 연작 등을 선보인다.

▲ The citizen, 1982-83, Oil on canvas, 2 canvases, each 200 x 100 cm, Tate Purchased 1985
▲ The citizen, 1985, Dye transfer, 48.8 x 48.8 cm (image) 64 x 63 cm (sheet), Hamilton Estate

그의 소재와 주제는 어떤 특정한 공통점이 없다.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자신의 집에서부터 사회를 보는 시각까지, 도대체 뭐라고 그의 관심사를 단정지을 수 있을지 고민될 정도다.

사람들은 물을 지도 모른다. 아니 결정할지도 모른다. 리차드 해밀턴은 정치 사회를 비판한 작가라고, 팝아트의 시작을 알린 팝아티스트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모더니스트라고, 그러나 당신이 만약 하나의 세계로 리처드 해밀턴을 단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밀턴을 '그저 그런 작가'로 여기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셈이 된다. 해밀턴은 절대 '규정을 지어서는 안되는' 한 명의 '예술가'일 뿐이다.

규정을 짓지 않고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하는 것. 그는 그것을 좋아했고 그것을 실천했을 뿐이다. <시민>이나 <$he>를 보며, 수감자들의 시위 모습과 이스라엘 핵 연구원이 납치죄는 순간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보며 사회 비판적 시각을 이야기하겠지만 그것도 사실은 소재일 뿐, 주제는 아닌 것이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그 현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사회를 향한 비판도 담겨져있겠지만 이는 소재 중 하나이지, 그의 전체가 아니다.  "사회 비판? 팝아트? 그냥 내 맘대로 작업하는 '예술가'야!" 그가 나타나서 이렇게 한 마디 할 것만 같다.

이 전시는 리처드 해밀턴을 회고하는 전시도, 리처드 해밀턴의 모든 작품을 나열한 전시도 아니다. 리처드 해밀턴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종의 안내서다. 그의 작품 제목을 잘 보면 '습작'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곧 '습작'의 연속인 것이다.

전시는 2018년 1월 2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