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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최영섭 "시쓰듯, 그림그리듯 작곡했어요"
80세에 대작 오페라 '雲林' 작곡한 영원한 현역
2009년 09월 09일 (수) 10:19:58 오를레앙 허 객원기자 press@sctoday.co.kr

 


예술가는 나이를 먹을 수록 자연을 닮는 것일까. 오늘 만난 ‘한국의 슈베르트’, ‘가곡의 왕’, 최영섭 작곡가 선생님의 모습은 흡사 초가을의 하늘 같았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한 건물로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 요즘 사스에 이어 세계인을 또 한번 긴장시키고 있는 신종플루 예방수칙을 안내하는 천막 메디컬 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

차들의 운행속도가 눈에 띄게 준 도로 안쪽에는 새롭게 조성이 막 끝난 광화문광장이 펼쳐졌다. 내심 푸르게 깔린 잔디밭을 기대했지만 또 하나 추가된 차가운 회색의 공간을 보고 있노라니 거장을 인터뷰해야하는 긴장감이 밀려왔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의 친구분들 사이에서 불리우는 애칭이 있다. ‘그리운 금강산’ . 아버지하면 ‘그리운 금강산’이고 ‘그리운 금강산’하면 아버지이시다. 가곡을 즐겨 부르시는 아버지는 그 가운데서도 유독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을 애창하시는데 누가보면 실향민인 줄 알정도이다.

오늘 난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존경하는 작곡가 최영섭 선생을 만난다.

 작곡가 최영섭(1929~) 선생님께서는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 카페를 택하신다고 한다. 예술가를 만나기 전 대극장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에 미리 느끼는 긴장감과 흥분, 좋지 아니한가. 

약속장소인 세종문화회관 뒤 로얄빌딩 라운지에 선생님은 우리보다 먼저 나와 계셨다. 노신사분들 틈속에 평범한 듯 앉아 계셨으나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으니 예술가에게는 후광이 있기 마련이다. 꾸벅 인사를 드렸더니 환한 미소로 맞아 주셨다. 그리곤 능숙하게 지하 카페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전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이십니다. 그리운 금강산 이 외에도 추억 ,모란이 피기까지 등 주옥같은 가곡만 200여곡 창작하셔서 한국의 슈베르트라는 애칭이 있으십니다. 가곡뿐만아니라 칸타타, 오페라등 인성 위주의  곡들을 많이 작곡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작곡은 제가 믿는 신이 내려주신 필생의 과업,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복중학교 졸업시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하기 위해 원서를 내려는데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당시 6년제 고등중학교 졸업때 유난히 동안이라 선생님들께서는 소아과 의사가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해방 직후라 어려운 시기에 돈도 잘 벌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1회 작곡 발표회를 이미 경복중학교 졸업전에 열었고, 작곡 분야에 이미 꿈을 키워갈 때여서 그런지 다른 분야를 선택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작곡가로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작곡을 공부해 서울대 음대에 가겠다라는 의지에 결국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서도 뜻을 굽혀 주셨죠. 벌써 70년 가까이 작곡 생활을 하고 있네요.

등산가는 산이 있어 오르고 미술가는 풍경이 있어 그림을 그리고 문학가가 생각이 있어 소설이나 시를 쓰듯, 시가 있으면 작곡하고 미술적 영감이 있으면 또 작곡하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 한번도 작곡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인생을 돋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요.

1961년 KBS에서 '그리운 금강산'이란 시가 있으니까 작곡을 해달라해서 작곡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문학을 좋아해서 그런지 인성위주의 곡들을 많이 작곡하게 됐어요.

여든이라는 춘추에도 불구하시고 작곡분량 480여페이지, 연주시간 두시간 삼십분 이상의 대작 오페라 운림(雲林)을 완성하셨습니다. 오페라 운림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운림’이란 한자 뜻 그대로 구름과 수풀을 의미합니다. 실은 그랜드 오페라 남자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서양의 오페라가 토스카, 아이다, 카르멘 등 여자 주인공 이름을 널리 쓰듯, 운림이란 남자 주인공 처사의 사랑과 운명의 서사시입니다.

나중에 잘아는 국문학자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실제는 자음접변으로 인해 ‘울림’이라 발음하는게 맞다고 하더군요. 이를 통해 중의적인 의미를 부여해 ‘인간의 사랑과 세상의 아름다움이 울려 퍼진다’는 의미를 추가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운림이 늘 피리를 부르는 것도 한 몫 했구요.

북한의 피바다 오페라가 이념을 거치하는 오페라라면, 저는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한 동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영어로 표현하자면 ‘Sound of Love'쯤 되겠군요. 그 오페라는 1956년경에 방과 후 특별 교재였던 설화 ‘운림지’를 20분짜리 피아노를 곁들인 오페라였어요. 관객 20-30명 두고 시험적으로 했으나, 의외로 호응이 좋아 여기에 스토리를 잘 붙이면 그랜드 오페라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로부터 20년 후쯤에 그랜드 오페라로 만들게 됐죠. ‘운림지’라는 작은 연못에 관한 전설은 20% 정도만 인용했고, 나머지 70-80%는 직접 창작했습니다. 실은 원래 문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기 때문에 소설도 쓰고 싶고, 시도 필명으로 여러편 써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필명을 고운산(高雲山, 운산은 호)이라 했습니다. 

테너 박인수선생의 ‘우리민요모음집’ 이란 음반을 보더라도 정선아리랑, 이별가등 선생님께서 직접 채보한 우리민요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채보곡들과 그 채보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1956년에 정선아리랑과 이별가란 노래를 김옥심, 이은주 명창이 불러 SP레코드로 만들었어요. 6.25 전쟁 후 1954년경에 레코드 가게에서 구해 들었더니 두 노래가 너무 감명적이더군요.

악보로 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SP레코드가 못쓰게 될 정도로 반복 청취하고 채보 작업을 했습니다. 피아노 반주도 한국적 국악 느낌이 나도록 했어요. 처음엔 서양 음악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더니, 성악가 박인수씨가 음반을 낸 후엔 꽤 많은 호응을 주시더군요.

대중들이 우리 민요에 대한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 후 이 두 곡 때문에 ‘한오백년’, ‘신고산타령’, ‘아리랑환상곡’, ‘달아달아환상곡’, ‘만가’, ‘상여소리’ 등 약 10곡 정도 채보 작업 및 편작곡을 더하게 됐습니다. 10곡정도의 우리 곡이 인생 통틀어 작곡한 250편의 가곡과 전부 맞먹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판소리 다섯마당 작품을 양악하는 작가들도 심층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하면 누가하겠어요. 서양 사람이 하게 되면 치즈, 버터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죠. 된장, 고추장, 초가집 냄새가 나야 한국적인게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70-80년대 TV,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등에서 해설이 있는 클래식을 통해 오래전부터 클래식 대중화에 힘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보기 드문 시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대중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제가 한일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어떻게 제 입으로 말 할 수 있겠어요. 자화자찬이죠 그럼...(웃음)

굳이 말하자면 길거리든 다방이든 어디서든 사람들이 ‘저분이야’ 할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죠. 방송 활동을 많이 한 덕분이죠. MBC 가을맞이 가곡의 밤을 십년간 편곡, 지휘했고 TBC '내마음의노래'란 프로에서도 가곡을 9시 뉴스 시작 전 5분 동안 틀어주기를 1260회를 했고, 편곡지휘 전담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KBS 등 FM 생방송만 22-3년 정도 했네요. 편곡, 지휘 및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것만 약 30년이 되네요. 또한 교육방송에서 15년, 국군방송에서도 15년, 교통방송에서 8년 정도 일하다 보니 돈도 좀 벌리더군요.  당시 서울의 평창동에 150평에 저택과 기사 딸린 자가용을 몰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때 집사람이 위암으로 세상을 떴어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잠시 눈시울 붉힘)

그후 3-4년간 홀아비 생활하다가 재혼했습니다. 이 사람과도 13-4년 잘 살다 뜻하지 않게 이혼을 하게 됐고, 결국 혼자된 지 14년째가 되네요. 요즘은 작곡보다 요리를 더 잘한답니다. (웃음) 독신생활하면서 아주 많이 늘었어요. 자주하기도 했으니까요.

비록 작곡에 손해는 봤어도, 인생에서 방송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 같애요. 원래 오페라도 3작품 정도 쓰고 싶었지만, 운림(완성), 춘향이,낙랑공주 중에 나머지 두 개는 힘들어서 못하겠더군요. 요즘 경기악화로 후원도 없는데다 업계 사정도 별로 좋지 못한 듯 싶고, 원래 예술가는 돈이랑 거리가 먼게 아니라 인연 자체가 없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선생님께서는 고향을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지역을 등지고 비교적 기회가 많은 수도권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데 그로인해 지역은 문화적으로 계속 퇴보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대안들이 필요할까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고향이 경기도 강화군 바닷가에요. 지금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옛날 강화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부모님도 강화에 모셨고, 강화군청 옆 강화문화원이란 곳과도 아주 인연이 깊죠. 심사 작곡 등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구요.

인천시민의 노래, 인천시민행진곡, 여러 학교 교가를 만들어 줬어요. 시립교향악단에도 있었고, 인천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요즘도 가끔 술한잔 하러 종종 갑니다. 마음은 늘 인천과 강화에 있습니다.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바로 저처럼 서울에서 살더라도 특히 자기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자주 방문하고 지역주민들과 호흡하고 그런 부분이 바로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주 가야죠! (웃음) 

선생님께서는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수록되어있는 칸타타 ‘오 아름다운 내강산’, ‘서울이여 영원하라’ ,광복절 50주년(1995) 기념대작 칸타타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을 발표하시는 등 주제만 보더라도 통일의 염원이 깃든 강한 조국애가 느껴집니다. 1998년에 금강산여행이 시작되자마자 그해 가을 금강산을 다녀오신 것으로 아는 데 그때의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최초로 VIP 자격으로 갈 수 있었지만, 당시 ‘그리운 금강산’ 때문에 정세를 보고 가려고 미뤘습니다. 결국 2000년 5월에야 비로소 갔어요.

북한땅을 밟을 땐 ‘애국가’, ‘그리운 금강산’, ‘전우의 시체’ 세곡은 부르지 않는게 좋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르게 되더군요. 그래도 감시원은 아무 말 안하던걸요.(웃음)

그때 느낀건 왜 이 아름다운 금강산에 새들이 없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너무 정화시키고 너무 깨끗하게 만들었더군요. 김일성의 휴양지니 오죽하겠어요. 벌레가 없었으니 새가 있을리 만무하죠. 물도 너무 맑아서 송사리가 살지 못하더군요. ‘너무 깨끗하다’ 인위적으로 너무 깨끗한 것도 지나치면 부작용이 있구나란 걸 느꼈죠.

우리 인간도 너무 깨끗하면 친구가 없잖아요?(웃음) 사람은 모름지기 실수도 좀 하면서 살아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보게된 경험이었습니다. 아니면 사람이 예수나 부처랑 다를게 없잖아요? 인간은 어딘가 모자르기 마련이고, 다 털어내려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생각해보면 80평생이 주마등처럼 흘러 갔더군요. 눈 8번 떴다 감았을 뿐인데, 손자손녀만 6명이나 되니...

1998년 모친 신순례 여사께서는 문화부장관으로부터 국민작곡가 최영섭을 길러낸 공로로 ‘장한 예술가의 어머니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매일 기도하셨다는 선생님의 어머님 신순례 여사는 어떤 분이셨는지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듯 싶네요. 강화 벽촌 바닷가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어요.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누님과 절 도시로 보내기 위해 애를 쓰실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선 ‘소는 시골로 끌고, 사람은 배움이 있는 곳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인천 창녕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이 금광업을 하시다 실패하셔서 어머니께서 강화에서 포목을 도매로 사서 평양까지 가서 파셨어요. 몇 달씩 걸렸던 일이셨기에 너무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매우 엄하셨어요. 울지도 못하게 하실 정도로 독하셨죠.

그후 어머니께서 돈을 좀 모으셔서 주안에 농장을 3만평 정도 장만 하셨어요. 농장 가운데 초가집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임에도 불구하고 구닥다리 피아노를 사주시더군요.

처음엔 음악을 말리셨는데 외아들 하고 싶은건 해주시고 싶으셨던지 얼마 후 임동혁 작곡가님에게 작곡 레슨 비용도 보내주시더군요. 레슨비는 지금도 비싸지만 당시 한번 받는 비용은 한시간에 쌀 한가마 반 정도였으니까요. 한달에 여섯가마면 아주 비쌌죠.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어머니께서도 외아들이 하고 싶은걸 해야한다는 주의셨어요. 95세 되는 해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식사 후 한잠 늘어지게 주무시곤 했습니다. 어느날 숨소리가 너무 약해서 어머니를 엎고 한양대 병원을 찾았는데 김현준 박사가 많이 도와줬죠.

어머닌 치마를 둘러서 여자지 굳건한 마음과 신앙은 참으로 대단하셨던 분이셨어요. 모든 어머니가 마찬가지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신앙이고 종교고 예술이 아닐까요. 요즘도 어머니께 하루 한번씩 잊지 않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이나 어머니나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니까요.

그리운금강산의 작시를 맡은 한상억 작가는 동향이신 인천에서 활동했던 문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리운 금강산 이외에도 그분의 다수의 시에 곡을 붙여 가곡을 완성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 분과의  잊을 수 없는 추억담은 없으신지요?

그분이 저보다 14세 정도 연상이셨죠. 6.25사변 후 인천 문화단체 연합이란 곳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당시 문총 인천지부장이 바로 한상억씨였습니다.

한달에 한두번 문학, 미술, 음악 모임을 하기도 하고, 막걸리도 종종 마셨죠. 한상억씨와 우연히 고향 이야기를 나누다 그분 고향이 바로 옆동네란걸 알게 된 후 급속도로 친분이 두터워졌죠.

같이 작업도 많이 했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강의 나라’ 등 30여곡을 한 것 같네요.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24장 가운데 17장 정도가 한상옥씨랑 했어요. 당시 고인의 아들이 미국 국방성 주요 인물이었어요. 한국에 나올 처지가 못 돼, 부모를 모시기 위해 초청을 했지만, 처음엔 안가신다고 하시다가 결국 미국으로 떠나셨어요.

고인께서 당시 심장이 안좋으셨는데 아들이 미국에서 완치에 가깝게 고쳐줬더군요.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 한국이 그리우셨는지 바로 92년도에 한국에 나오셨어요. 제주도, 경주, 해인사 등 전국 곳곳을 무리하게 다니시다가 미국 가시기 이틀 전에 서울에서 뷔페를 대접했던 게 마지막 모습을 본거랍니다.

미국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별세하셨어요. 너무 갑작스러워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저도 그래서 죽기 전에 회고록 한번 쓰고 싶답니다. 어쩌다보니 제 인생에 굴곡이 참 많은 것 같더군요. (웃음)

   
큰아들 최성원씨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가수겸 작곡가입니다. 그룹 들국화의 멤버일뿐만 아니라 솔로로 활동한 1집에서는 ‘제주도의 푸른밤’ 등 선율의 마이더스 손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아름다운 곡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아마도 대작곡가이신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지 않았나 싶은데요.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아드님이 음악인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고대 들어 가기 전에 피아노 열쇠를 잠궈 버렸어요. 아들이 다른 길을 걷길 원했어요. 한번은 효자동 아들 집에 갔는데, 창밖으로 기타 소리가 들리더군요. 화음이 제대로였어요. 혼자 독학했다더군요.

그후로 마음이 누그러지더군요. ‘제주도 푸른 밤’ 등을 보면 아들의 작품은 일반 대중가요와 가곡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보면 될 겁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겠죠.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음대를 보낼 걸 그랬어요. 그래도 유행가의 힘이 있더군요. 아들 저작권료가 저보다 많은걸 보면.(웃음)

선생님께서는 현재 많은 직함을 갖고 계시는 데 그 가운데 우리 가곡의 날 제정 위원회 위원장이시기도 하십니다. 우리 가곡의 날 제정이 필요한 당위성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가곡의 날을 제정해서 일반사람들에게 인식을 시켜야합니다. 기념일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2005년 제1회 ‘우리 가곡의날’을 제정, 선포했어요.

11월11일 빼빼로데이에 일부러...젊은 층부터 가곡을 좋아하게 만들어 보자라는 취지였죠. 창단 위원 11명, 고문 11인, 11명 공동대표 중 제가 상임 대표를 맡고 있어요. 올해는 국회의사당 헌정기념관에서 할 계획입니다. 정식으로 선포하기 위해 청원서 6천매를 받아 문화체육관광부에 갔더니 현재 접수된 날이 너무 많아 이것만 해주기 어려우니 자체적으로 하라고 해서 현재 그러고 있습니다.

올해가 벌써 5회째네요. 4회째까진 자비를 털어 파티할 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우리 가곡을 살려나가기 위해 이모저모 애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기념 3테너 콘서트 때, 그리운 금강산이 불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신다면요.

‘그리운 금강산’을 홍혜경, 김현주, 박미혜씨와 호세카레라스,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일본에서 공연했어요. 전세계적으로 37억명이 봤다더군요. 그리운 금강산은 제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긴 했지만, 한편으로 분단된 조국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조차 없었겠죠.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인생도 그런게 아니겠어요?(웃음)

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왕성한 작품활동 기대하겠습니다. 특히 장장 반세기 동안 준비하신 선생님 인생의 역작 오페라 운림이 하루속히 초연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오를레앙 허(허성우/숭실대실용음악과 강사)) 객원기자/ press@sctoday.co.kr

사진/양문석 기자 msy@s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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