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정준모 ‘천경자 명예훼손 혐의’ 무죄, 석연찮은 결과의 이유
[기획]정준모 ‘천경자 명예훼손 혐의’ 무죄, 석연찮은 결과의 이유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12.0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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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내용, 천 화백 평가에 부정적 영향 단정할 수 없어” 재판부가 생각못한 것들

故 천경자 화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 담당 검사가 바로 항소를 하면서 명예훼손 여부는 2심 재판부의 공으로 넘어가게 됐다. 

정 전 실장은 지난 2015년 11월 언론 기고문과 인터뷰를 통해 "천경자 화백이 그림이 인쇄된 포스터만 보고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며 원본을 가져가니 '착각했다'면서 위작 주장을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1990년대 출간된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회화선집'에 <미인도>가 수록됐는데 이 책의 제작에 천 화백도 관여했다"면서 천 화백도 <미인도>가 진품임을 인정했다는 주장을 폈다.

▲ 故 천경자 화백

이로 인해 천 화백 유족 측은 '사자명예훼손'으로 정 전 실장을 고발했고 법원은 벌금 300만원으로 약식기소했다. 그러나 정 전 실장은 정식재판을 요구했고 결국 지난달 3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정 전 실장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당연히 유족 측은 반발했고 검사는 항소했다. 그리고 곧 2심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소의 '위작' 결론을 가볍게(?) 뒤집고 '진품'으로 발표를 하면서 <미인도> 논란은 봉합할 수 없는 단계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얼핏 보면 검찰 발표로 종결이 났다고 비칠 수 있지만 일반 대중들도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으며 국회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도 <미인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국정감사에서 <미인도>가 진품임을 주장하며 "작품이 말을 거는 것을 나름으로 들었다"고 말한 박우홍 전 한국화랑협회장의 발언이 누리꾼들의 웃음거리가 된 부분만 봐도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이제 정준모 전 실장의 '사자명예훼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 전 실장이 거짓 진술로 천경자 화백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은 일단 정 전 실장에게 면죄부를 줬다. 왜 이런 판단이 나오게 됐을까? 그리고 그 판단은 과연 정확한 것이었을까? 이 부분을 짚어봐야할 것 같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주장, 허위 근거 부족’ 내세운 재판부

1심에서 서울중앙지법 형사25단독 박강민 판사는 "기고문 등의 내용이 천 화백의 사회적, 역사적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정 전 실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 전 실장은 기고문에서 '천 화백이 그림이 인쇄된 포스터만 보고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지만 논란이 불거지던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림 원본을 포스터와 함께 천 화백에게 보여줬고 천 화백이 원본을 직접 본 후 '가짜'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포스터만 보고 위작이라고 주장했다는 정 전 실장의 주장은 거짓이 되는 셈이며 이는 검찰 자료에도 들어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법원은 정 전 실장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내용이 축약되어 표현된 것 같다"라는 진술을 받아들이면서 "기고문의 내용에 천 화백이 원본을 두 차례에 걸쳐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천 화백이 포스터만 보고 위작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고의적으로 허위 사실을 밝힌 점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이를 알거나 증명하기 어려운 이상 적시된 사실의 내용, 허위가 아니라고 믿게 된 근거나 자료의 확실성, 표현 방법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뒤 "적시된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경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망인이나 그 유족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하고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에도 한계가 있어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아니한 점도 고려되어야한다"면서 검사의 증거만으로는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미술품의 진위 여부는 미술계에서 종종 일어난다. 이에 관해 논쟁이 일어나고 사회적 이슈가 된다 해도, 미술품의 진위 논란이 곧 그 작가의 사회적 평가를 해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힌 뒤 "미술품은 완성된 이후에는 이미 작가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작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별개로 작품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별도로 이루어지므로, 이를 작가의 인격체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무죄로 최종 판결했다.

1심은 검사의 자료만으로는 정 전 실장의 주장이 허위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으며 <미인도>의 진위 평가가 곧 작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한 마디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수사 기록도 제대로 안 읽고 정 전 실장 변명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1심의 논리를 되짚어보면 석연찮은 부분이 발견된다. 우선 검사 자료에서 이미 천 화백이 포스터만 보고 위작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와 있다. 앞서 말한대로 천 화백은 원본을 확인한 뒤 위작임을 주장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천 화백에게 원본을 보여줬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그런데 법원은 ‘내용이 축약됐다’는 정 전 실장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관적 인식의 유무는 그 성질상 외부에서 이를 알거나 증명하기 어려운 이상 적시된 사실의 내용, 허위가 아니라고 믿게 된 근거나 자료의 확실성, 표현 방법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정 전 실장의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천 화백 측은 “천 화백이 실물을 보지도 않고 진품이라고 주장했다는 소문은 정 전 실장 등 화랑계 인사들이 꾸준히 퍼뜨린 허위 사실 중의 하나”라면서 “검찰 진술에서 허위 사실이 인정됐는데도 불구하고 ‘허위 인식이 없었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반박하고 있다. 

천 화백 유족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배금자 변호사는 “정 전 실장은 기고문에는 ‘인쇄물을 본 즉시 천 화백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며 통보했다’고 했지만 검찰 진술에서는 ‘진위 여부를 말하는 데 있어, 원본을 보고 이야기하는지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지 여부가 매우 중요하지 않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당연히 원본을 보고 이야기해야지요’라고 원본 확인의 중요성을 인식한 기록이 있다”면서 “‘의도는 없었다. 내용이 축약됐다’는 정 전 실장의 변명은 검찰 진술과도 맞지 않고 수사 기록을 다 읽지 않고 피고인의 변명만 수용한 재판관의 판단은 적절치 않다. 이 내용이 이미 인터넷 기사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는 판결문이 나온 것이 의아하다”고 밝혔다.

▲ 정준모 전 실장(오른쪽)은 <미인도>가 진품임을 주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에 대한 허위사실을 고의적으로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인도> 진실, 오래 전 지나간 ‘역사적 사실’일까?”

재판부는 “적시된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경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망인이나 그 유족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하고 또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에도 한계가 있어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아니한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판결은 1998년 2월 27일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KBS에서 방영된 ‘광복 50주년 기념드라마 <김구>’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이 김구 선생의 암살을 암시, 선동한 내용이 나왔다며 김창룡 가족이 KBS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한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여러 관계자들이 김창룡이 배후 인물일 것이라는 진술을 했고 안두희 자신도 시인한 바가 있기에 단순한 억측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한 것이며,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김창룡 본인은 물론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했고 백범 암살 사건 또한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을 참작하면 피고(KBS) 가 이 사건 방송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이같은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재판부는 이번 명예훼손 건도 그와 같은 판례를 인용해 판결했다. 

이에 대해 배 변호사는 “당시 판례는 역사적 사실의 탐구와 표현의 자유가 더 보호되어야하기에 방송사에 대한 명예훼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례”라면서 “2015년 8월 (천 화백이) 사망한 소식이 10월 국내 언론에 알려지자 11월에 허위 사실로 가득한 기고문으로 금방 사망한 천 화백의 명예를 훼손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판례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천 화백 측은 “이 사건은 천 화백 생존시에 매듭지어져야했던 것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작가 의견을 묵살하고 스스로 미제사건으로 만든 사안”이라면서 “천 화백이 사망했다고 해서 바로 진실을 규명할 객관적 근거가 사라지거나 진실 여부 확인이 곤란한 역사적 사건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핵심은 ‘진위 논쟁’ 아닌 심각한 거짓말 유포”

여기서 또 하나의 논란 거리가 등장한다. 정 전 실장의 기고문과 주장이 결코 ‘사자명예훼손’이 아니라는 법원의 판결 이유다.

법원은 “미술품은 완성된 이후에는 이미 작가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작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별개로 작품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별도로 이루어지므로, 이를 작가의 인격체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의 논리대로라면 <미인도>는 이미 세상에 나온 순간 천경자 화백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며 <미인도>에 대한 호불호, <미인도>의 진위 여부는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평가이지, 작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와 행동이 결코 천 화백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배금자 변호사는 “이 사건의 핵심은 ‘미술품의 진위 논쟁’ 이 아니고 ‘진위논쟁’이 작가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도 아니다. 정 전 실장이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본인의 주장을 펴기 위해 천 화백에 대한 심각한 거짓말들을 유포했다는 것”이라면서 “<미인도>가 가짜라고 천명한 작가의 주장을 뒤엎기 위해 여러 허위사실들이 난무하면서 이 작가가 지켜온 고고한 창작세계와 인품은 처절한 상처를 입었다. 천 화백의 작법과 완전히 다른 <미인도>가 이들의 허위유포로 진품으로 인정될 경우, 천 화백의 독특한 작가로서의 경지는  침해받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천 화백 측은 “기고문 어디에도 <미인도>에 대한 미술적 논의와 미학적  분석,  비평은 찾아볼 수 없다”면서 미술적인 분석이 아닌, 진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억지 주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 전 실장을 고발했던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 교수는 지난 7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련 번호, 액자 뒷면에 이름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진품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들이 모두 허위라는 점도 문제지만 비평가라는 사람의 주장에 비평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면서 “얼마든지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는 위치의 현대미술관 학예실장직을 수행한 사람이 허위 사실 유포로 한 예술가를 돌아가신 후까지 인터뷰나 각종 언론을 통해 비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고소인 진술서에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천 화백 측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정 전 실장의 주장은 미술학적 분석이나 논리가 없는 허위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기에 표현의 자유로 보여질 수 없으며, 천 화백이 세상에 없다고 해서 진실을 규명할 근거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가 없으며 무엇보다 <미인도> 진품 주장을 위해 천 화백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품과 작가는 별개이며 미술품의 진위가 작가의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법원의 판단은 틀렸다는 것이 된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법원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주장한 검찰의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정 전 실장을 감싸고 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과연 ‘미술품과 작가는 별개다’라고 판단한 법원의 생각이다. 그것은 과연 옳은 전제였을까?

‘미술품과 작가는 별개’ 옳은 전제가 아닌 이유

작가들은 항상 ‘작품이 나오면 바로 내 손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을 내놓은 후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는 질문을 하면 반드시 듣게 되는 답변이기도 하다. ‘세인들의 평가에 맡기겠다. 그 때부터 작품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작가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논리를 이 상황에 맞추기는 어렵다. 작품은 어떻게 보면 작가의 자식이다. 자식이 문제가 생기면 자식만 혼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혼이 난다. 자식을 보면서 부모를 평가하기도 한다. 이 상식을 법원은 생각하지 못한 듯 하다. 예술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런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들이 천 화백의 주장에 힘을 싣는 이유는 “내 자식을 못 알아보겠냐”라는 천 화백의 절규가 통했기 때문이다. 수십년을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천 화백의 일관된 모습에 사람들은 동조했고 이는 검찰의 진품 주장에 대한 불신과 박우홍 전 회장을 향한 비웃음섞인 댓글로 표현됐다. 

<미인도>의 진실은 결국 한국 미술의 ‘후진성’이었다는 지난해 본지 <서울문화투데이>기사의 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게 우리는 2심 결과를 엄중히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