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은관문화훈장 수훈한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김구림 “현실이 작품을 만들도록 나에게 명령한다”
[인터뷰] 은관문화훈장 수훈한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김구림 “현실이 작품을 만들도록 나에게 명령한다”
  •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 승인 2017.12.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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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인식 없이 작품만 그리는 지금 세태, 내 작품 모두 펼쳐보이고 싶다”

지난 7월, 주영 한국문화원이 개최한 ‘아방가르드 리허설’. 한국의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소개한다는 전시에는 특정 작가의 작품들이 한국 아방가르드의 대표처럼 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선구자’의 이름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구자’는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팜플렛에는 잘못된 정보가 버젓이 올라있었다. 결정적으로 그 ‘선구자’는 어떤 작품이 어떻게 전시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먼저 알려졌고 마침내 그 ‘선구자’는 언론 기자들 앞에서 이 부당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기자들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김구림은 이렇게 큰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난과 좌절, 이로 인한 해외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방가르드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던 시절, 특정 학교 출신들이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던 그 시절에 학벌도, 인맥도 없었던 그는 그야말로 비난과 질시, 따돌림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해외로 갔고 해외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해외에서 호응을 얻자 그동안 그를 비판했던 국내 미술평론가, 사가들도 덩달아 호평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비난은 이어졌다. 일본으로, 독일로, 미국으로, 외국 생활이 계속됐다.

그리고 이제 80이 넘은 나이, 고국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한국에 안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순간에 또다시 영국문화원 문제가 불거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대한민국은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지난 11월 문화체육관광부는 김구림 화백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1960년대 말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를 발표하고 다양한 국제무대에 참석해 한국 전위예술의 첨병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한다”고 문체부는 밝히고 있다.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임을 대한민국, 국가가 스스로 인증한 것이다.

훈장을 받은 바로 다음날, 우리는 김구림 화백을 만났다. 그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는 직언을 서슴없이 전했다. 우리 미술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불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작가들을 깎아내리기에 바쁜, 공부하지 않는 이들을 향한 불같은 경고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김구림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다. 현장에서 소감을 밝혀야하는데 소감을 말할 시간을 주최 측이 주지 않아 참 아쉬웠다. 이 자리를 빌어 소감을 부탁드린다.

원래 상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포츠 같은 것은 순위를 매겨서 우승을 결정짓지 않나. 물론 요즘에는 스포츠에도 조작이 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순위는 1등 2등을 가려서 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1등 2등을 나눌 수가 없는 것이기에 상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당연히 욕심도 없었고. 

상을 받는 것에 무덤덤했는데 한 석 달 전쯤에 무슨 서류를 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뭔가 했는데 바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주는 훈장이라고 하는데 정말 덤덤했다. ‘나이를 먹으니까 상을 주는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지(웃음).

그동안 정말 많은 설움을 받고 살았다. 학벌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로 정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최근에는 ‘영국문화원 문제’까지 생겼다. 

상을 받았을 때 꼭 한 마디를 하고 싶었다. '학벌이 좋지 않으면 이런 일을 겪게 되는구나'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소감을 전하는 시간을 주지 않아 아쉬웠다. 

그 자리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옆에 앉았는데 내가 도 장관에게 '(공무원들 때문에)나라 망신 시키지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마침 도 장관이 ‘영국문화원 문제’ 관련해 서울문화투데이 기사를 읽었는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가 바로 받아친 것이다. 무식한 공무원들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 장관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웃음). 

올해 정말 나쁜 일과 좋은 일이 한꺼번에 생겼다. 영국문화원 사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하셨는데 훈장 수훈으로 조금 마음이 풀리실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사건에 실망감이 많았다. 물론 그 실망감이야 회견이나 글로 이야기를 했지만 어느 평론가나 미술사가들도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언론도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 말았다. 그나마 서울문화투데이가 계속 관심을 가져줬지만 우리 미술사가 달려있는 문제를 이렇게 소홀히 지나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저 세상으로 가면 끝이지만 우리 미술사는 보존되어야하지 않는가. 내가 다행히 글을 쓸 수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글로 알리고 기고를 할 수 있었다. 그림만 그리고 살았다면 아마 화단에서 묻혔을 것이다. 장관에게도 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무식한 공무원을 들이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미술사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논문을 쓰는 걸 보면 거의 베끼기가 많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 안하고 무조건 베끼고 그걸로 석사 따고 박사 딴다. 그러니 강연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사실인양 이야기하는 거다. 

<1/24초의 의미>가 내 작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어느 사람이 이야기했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런 잘못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나를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

▲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하도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훈장을 받아도 또 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게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너무나 많이 억울한 일을 당하다보니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상반기에 좋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이번 훈장으로 그래도 마무리를 잘 했는데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게 지금 내 현실이다.

국내에서 작품 활동이 어려워서 해외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국내에서 혹평을 많이 듣자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도 혹평을 들으면 붓을 꺾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일본에서 호평을 받고 국내에 들어오니 사정이 달라져있었다. 그제사 호평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이 쓴 것이 일본에서 나온 평론을 거의 베끼다시피 쓴 글이었다. 일본에서 인정받으니까 국내도 덩달아 인정하기 시작한 거다. 

그나마도 반짝이었다. 다시 험담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다시 좌절감을 안고 미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비자가 여의치 않아 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미 전통이 완전히 망가져있더라. 결국 독일로 갔고 독일의 진보적인 예술의 영향을 받게 됐다. 그렇게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아방가르드를 개척한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류 미술에서 밀려나있었고 이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아직 선생님의 존재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구에 있었을 때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든 적이 있었다. '앙그리'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고 전시를 했다. 처음에는 일반 회원으로 참여했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회장을 맡게 됐다. 정말 단체를 카리스마있게 이끌었다. 

그 무렵 미협 선거가 있었는데 상대방 측에서 '김구림 건방지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내가 할 말은 하는 성격이다보니 상대방이 그렇게 무시한 것이다. 그 문제로 신문의 기고를 통해 공방을 벌여 기고를 했고 내가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됐다. 

서울은 허허벌판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도 서울미대 아니면 홍대 이렇게 끼리끼리 뭉쳐있기만 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젊은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이 학교에서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들, 세계의 사조라던지 세계 미술의 흐름 같은 것을 술술 이야기하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지 않나. 그렇게 해서 이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바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였다.

그렇게 해서 60년대말 전기를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을 만들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제는 화가 한 사람만이 만드는 작업으로는 안되겠다. 다른 작가, 다른 장르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사람들을 모았다.

마치 <수호지>에서 양산박이 모이듯 말이다. 실제로 <수호지>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고. 초등학교만 나와도, 누구보다도 작품 활동에 자신있는 사람은 전부 회원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아방가르드를 시작한 것이다.

▲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1970. 4. 11. 한강 살곶다리 부근

당시에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

전위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개척자라는 입장을 가지고 했다. 

이런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저항’으로 비춰질 수 있었겠지만 저항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는 시대에 저항하는 생각보다도 뭔가 새로운 것을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그것이 곧 저항이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항 이전에 전위라고 나는 보고 있다.

아방가르드하면 선생님과 더불어 정찬승, 강국진 작가 등이 생각난다. 특히 두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픈 것이 있을 것 같은데

강국진은 참 불행하게 살았었다. 형편이 거의 기울었는데 당시 판화 붐이 일기 시작할 무렵 판화를 시작하려했는데 프레스를 살 돈이 없었다. 외국에서 수입해서 가져와야하기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와 같이 고물상에서 인쇄기를 사서 그걸로 직접 프레스를 만들어 판화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판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 때 판화를 배우러 왔던 이가 지금 강국진 작가의 아내다. 이후에 지인의 소개로 대학 교수가 되면서 형편이 피었고 하남시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정찬승은 나와 함께 어울려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를 당해왔다. 형제간에 우애가 좋았고 어머님도 나를 좋아해서 그의 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많았는데 미국을 가고 싶어했지만 비자 문제 때문에 되지 않았고 나와 함께 파리에 있었다. 

이후에 내가 먼저 파리를 떠났는데 내가 가고 난 후 불법체류자로 몰렸다. 다행히 강남에서 큰 카페를 하던 동생이 돈을 대줘서 파리를 벗어나 미국 비자를 얻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사는 것으로 알았는데 2000년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몸이 많이 쇠약해보였는데 결국 그게 마지막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술을 많이 마신 것이 결국 그의 몸을 망가뜨린 것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한번은 혼자서 소주를 한 병 마신 적이 있는데 그 순간 '큰일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일찍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 백남준 작가도 나에게 "전위예술을 하는 사람은 오래 살아야한다"는 말을 했다. 인정받을 때까지 살아야한다는 뜻이 있었던 거다.

‘시대가 나를 작품을 하게 만들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는?

우리는 라디오 세대다. 우리 때는 라디오를 들으며 상상을 했다. 라디오 드라마가 한창 유행일 땐데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상황인지를 상상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다 흑백TV가 나왔다. 장면에 대한 상상은 깨졌다. 하지만 색깔을 상상하며 TV를 봤다. 하지만 칼라TV가 들어서면서 우리의 모든 상상은 깨지고 말았다.

기계로 인해 인간의 상상이 매몰되고, 종내는 기계에 종속되고 있다. 문명의 노예가 되어 거기에 매몰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더 편한 것만을 만들고 추구하려한다. 이럴 때 인간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이걸 제시해야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방울만 찍고, 점만 찍어서 그림으로 내놓는 이들이 많다. 그래놓고 그것이 현대미술이란다. 정말 케케묵은 생각이다. 지금도 ‘현대판 노예’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나오고 자식이 아비를 살해하는 등의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점이나 찍고 있다니? 

현대판 노예, 난민을 부각시키는 작업. 그것이 곧 리얼리즘이기도 하다. 현실이 작품을 만들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앞의 그 말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은 사실 휴식기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잠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갑자기 무엇인가가 오면 그 때 다시 작품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휴지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활동을 잠시 쉬고 있는 거고.

▲ 지난해 아라리오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김구림 작가

선생님 그림이 한때 고가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내 그림이 고가에 팔렸다고 하는데 그 그림은 70년대에 그린 평면이었다. 조금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옛날 작품이다. 나는 60년대가 다르고 70년대, 80년대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내 작품을 보고 ‘정체성이 없다’고 비난하는데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정체성이 없다고 하는 논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냥 붓으로 칠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 죽은 이미지를 행위로 살려나간다. 물감이 흐르고 튀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거기에 내 정신을 담는다. 정신과 이미지가 화면에서 부딪히는 제 3의 세계, 그것이 나의 평면이다.

그것을 유럽 사람들은 정말 좋아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엄청 비난했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내 스타일이 동양적인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기 전에 내 작품을 모두 펼쳐보이는 것이 꿈이다. 그림이나 <1/24초의 의미>는 물론이고 과거에 한 연극 연출, 안무, 현대음악 작곡 등 내가 했던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 이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