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와 더불어 보는 발굴사, '서울의 발굴현장'
서울의 역사와 더불어 보는 발굴사, '서울의 발굴현장'
  • 정상원 인턴기자
  • 승인 2017.12.2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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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55년간의 발굴 과정, 9번째 내 고향 서울 시리즈
▲ 서울의 발굴현장 표지 (사진제공=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편찬원은 광복 이후 서울 소재의 유적지 발굴이야기를 담은 ‘서울의 발굴현장’을 발간했다.

역사편찬원은 그간 서울의 유형문화를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내 고향 서울 시리즈’를 발간해왔다. 이번 ‘서울의 발굴현장’은 9번째 권에 해당한다.

‘서울의 발굴현장’에서는 1961년 강동구 명일동의 청동기시대 집터를 처음 발굴한 사례를 시작으로 10년 단위로 2015년까지 서울 지역의 유적 발굴 이야기를 담았다.

1960년대 서울 발굴은 순수 발굴의 시기로 서울이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 사업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유적 보존에 관한 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여서 야구장 건설로 인해 암사동 유적이 파괴될 위기에 처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협력하여 유적을 발굴한 사례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울의 도시화, 특히 강남 개발과 함께 진행된 발굴이다. 서울 확장 과정에서 출토된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을 두고 고뇌하던 고고학자들의 노력이 오늘 날 유적을 남아있게 만들었다.

▲ 1984년 몽촌토성 발굴 현장 (사진제공=서울역사편찬원)

1980년대는 올림픽 개최를 위해 유적 복원을 위한 발굴시대였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복원 지역이 넓어졌고 개발을 위한 발굴이 아닌 복원을 위한 발굴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강북에는 궁궐복원, 강남에서는 몽촌토성 복원이 이뤄졌지만 경희궁의 원형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문제점도 생겼다.

▲ 1997년 풍납토성 발굴 현장 (사진제공=서울역사편찬원)

1990년대는 구제발굴의 전성시대였다. 재건축 사업이 성행한 시기에 출토된 풍납토성은 굴삭기로 파헤쳐지는 위기를 맞았지만 국민들의 관심으로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이후는 발굴을 위한 발굴의 시대로 이전 시기보다 발굴 건수와 내용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국가 단위의 규제와 지침의 영향이며 발굴된 유적은 서울 이해의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다. 특히 4대문 안인 종로구와 중구 서대문구에서 생활유적이 대거 발견됐다.

또한 책에서 대표적인 유적으로 60년대는 암사동 유적, 70년대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 80년대는 조선 궁궐과 몽촌토성, 90년대는 풍납토성, 2000년대 이후는 한양도성을 꼽았다.

김우철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이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유적들이 어떠한 발굴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아울러 서울 시민들이 서울의 역사를 이해하고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