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아사카와 노리다카, 조선에 빠지다(1)
[특별연재] 아사카와 노리다카, 조선에 빠지다(1)
  • 동산 이동식/언론인 ·저술인
  • 승인 2018.01.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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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소장 공예품 3천여점과 도편 30상자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 동산 이동식/언론인·저술인/현 KBS 비즈니스 사/2010.06~ 제7대 한국불교언론인회 회장/KBS 정책기획본부 본부장 역임

미국과 서구 여러 나라들의 문명의 힘을 실감하고 이를 재빨리 배워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경제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1905년 한일보호조약, 그리고 5년 후인 1910년에는 (강제적인)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보다 34년 전인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면서부터이고 합방 이후에는 엄청난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다.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합방된 1910년 말에 한국(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약 17만 명이었는데 1911년 말에는 21만 명, 1912년 말 24만 명, 1913년 말 27만 명, 1914년 말에는 2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이주민 중에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출신의 미술선생 아사카와 노리다카(浅川伯教)도 있었다.

1884년생인 노리다카는 고향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한 관계로 이 고장의 유지이며 자신보다 4살 연상인 코미야마 세이조(小宮山清三)를 친구로 만나 그가 모아놓았던 조선의 고려청자 등 수집품을 보고는 일찍부터 조선, 곧 한국 땅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이윽고 서른 살이 되던 1913년 조선 근무를 지원해 5월 초순에 서울(당시는 경성)의 소학교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그 이듬해에는 농림학교를 나와 영림서(營林署)에서 임업연구를 하던 일곱 살 아래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를 서울로 부른다.

원래 고려청자에 매혹되었던 노리다카는 5월 초순 서울에 와서도 곧바로 창경원에 있는 く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을 찾아 고려청자를 몇 번이나 보고 다녔다.

어느 날 길거리를 가다가 한 골동품가게 진열창에서 하얀 백자 항아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동안 많이 보던 고려청자가 아닌 흰 색의 평범한 생활용기였다. 백자를 본 순간을 스스로 이렇게 기록한다.

“그 무렵 나는 너무나 쓸쓸했다. 좋은 물건이 하나 탐이 났지만 값이 비싸서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경성의 고물상 앞을 지나다 보니, 어수선하게 늘어 놓인 조선의 물건들 사이에 하얀 항아리가 홀로 전등불 아래 있었다. 얌전스레 솟아오른 둥근 이 물건에 마음이 끌려 멈추어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 (『조선의 도자기(李朝の陶瓷)』1956) 

이것이 노리다카와 조선시대 백자, 그러니까 근대 일본인과 조선시대 백자의 첫 만남이었다. 노리다카가 이 항아리를 사갖고 간 것은 물론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좋아하던 고려청자보다도 순박하고 소박하고 순수하고 정결한(그리고 당시에는 값도 비교적 싼) 조선백자에 그만 매료되었고 아예 그것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고려청자는 과거의 차가운 아름다움이지만, 이 백자는 현재의 내 피와 통하는 살아 있는 벗이다”(『조선 미술공예에 대한 회고』)라고도 했다.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이 처음으로 일본인의 눈에 뜨인 것이고 그것으로서, 즉 노리다카에 의해 조선백자는 예술명품으로 부활한다. 

당시 조선 각지에는 토목공사가 한창이었고, 종종 그 현장에서 도자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그는 이 도자기 파편들을 모아 조선 도자기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시대 백자는 아직 눈여겨보는 사람이 적었기에 대단히 싼 값으로 사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도자기 연구와 수집, 그리고 소학교 교사 생활을 함께 하였는데, 특히 여러 과목 중에서 그림이나 수공예 지도를 잘하는 선생으로 정평이 나 있는, 좋은 선생이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관심사는 교육보다는 미술이었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 되면 도쿄로 건너가 조각을 배웠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 통치했을 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일본에 널리 알린 사람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임은 우리가 이제 많이 알고 있다. 또 일제시대 우리나라에 살다가 우리 땅에 묻힌 아사카와 다쿠미(淺川攷)도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런데 이들 둘이 조선의 도자기와 공예품을 연구해서 이를 널리 알리는 민예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바로 아사카와 노리다카였다.

한국에 건너온 뒤에 도자기를 모으면서도 조각가의 꿈을 키워왔던 노리다카는 이듬해인 1914년 로댕의 진품 조각작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보고 싶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로댕의 진품 조각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를 치바현(千葉縣) 아비코(我孫子)에 있는 그의 집으로 방문한다. 9월이었다.

이 때에 선물로 갖고 간 것이 조선의 백자추초문각호(白磁秋草文角壺, 현 일본민예관 소장)였다. 그것이 야나기가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 백자추초문각호

야나기는 이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현황,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이윽고 한국을 찾게 된다. 1916년 야나기가 처음 한국 땅을 찾을 때 노리다카는 그를 영접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노리다카를 만나 부산의 고물상에 같이 간 야나기는 17세기에 만든 철사운죽문항아리(24.7x22.5㎝)를 하나 구입한다. 이것이 야나기의 본격적인 도자기 수집의 시작이었다.

야나기는 노리타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동생인 아사카와 다쿠미와도 인사를 나눈 뒤에 그의 집에서 잠을 잤다. 다쿠미는 당시 직장인 임업시험장이 있던 청량리에서 한국인들의 집을 구해 한국인의 옷을 입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던 터여서 그의 집에는 한국인들이 쓰던 생활용구, 공예품들이 수집돼 있었다.

야나기가 한국의 민속공예품에 빠져들게 된 시발이 이처럼 아사카와 형제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의 조선에서의 교사 생활은 6년 뒤인 1919년 3월1일 발생한 대규모 만세 운동 이후 변화가 온다. 3・1운동이 있은 직후인 1919년 4월에 노리다카는 교직을 그만 두고 도쿄로 잠시 돌아가 본격적으로 조각을 공부하였다.

로댕에 경도되었던 노리다카는 1920년 10월에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을 묘사한「나막신 신은 사람(木履の人)」과 1922년 3월 도쿄에서 주최된 평화박람회 기념미술전에서「평화로운 사람(平和の人)」을 출품해 입선하는 등 조각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로댕을 떠오르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수상 직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 도자기 연구에 몰두하였다. 도자기 조각을 모으고 발굴 유적을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도자기의 시대적 변천을 명확히 하는데 성공한다.

▲ <나막신 신은 사람>

그의 도자기 연구에는 자신을 따라 조선에 온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가 동행했고 1926년에는 계룡산 동학사 계곡의 가마터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자기 연구를 하는 그를 두고 친구들은 ‘총알’이라는 별명으로 놀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노리다카의 연구 

노리다카는 조선의 도자기나 가마터, 공예품과 고적(古跡) 등을 수 십 년 동안 연구하였다.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가 다닌 도자기 가마터는 700여 곳에 이르고 있다. 당시 아무도 하지 않은 백자와 분청 등 조선시대 도자기를 가마터에서부터 철저하게 조사하고 관련 유물과 자료들을 수집했다.

1925년 1월에 계룡산, 강진 등지의 옛 가마터를 조사했고 1927년 하순에는 동생인 다쿠미와 둘이서 분원(分院)의 옛 가마터를 조사했다. 또 일본의 옛 도자기와 조선의 그것을 비교 연구하기 위하여 1927년 1월에는 하카다(博多), 가라쓰(唐津), 나가사키(長崎) 등지의 옛 가마터를 조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집한 엄청난 양의 도자기 파편을 통해 도자기의 발생 연대와 지역적 특성과 차이를 정리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500년에 걸친 조선시대 도자기를 맨 처음 확실하게 정리했고 『부산 가마와 다이슈 가마(釜山窯と対州窯)』(1930년),『조선의 도자기(李朝の陶磁)』(1956년),『도기전집17 조선시대 백자・청화・철화(陶器全集17李朝 白磁・染付・鉄砂)』(1960년)와 같은 저서를 남겼다. 이윽고 그에게는 어느 새「조선도자기의 신(神)」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노리다카는 1913년에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조각 공부를 위해 도쿄에 체류한 기간도 있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이 광복이 된 후에도 한반도에서 도자기 연구 성과 등을 처리하고 1946년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약 3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반도에서 보내며 조선의 전통 문화 연구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폈다.

지금까지 알려진 노리다카의 활동 영역은 도자기 연구와 실제 제작, 가마터 조사 등 한반도의 도자기 관련 고적 방문, 회화 및 조각 등과 관련한 미술 방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 연구의 업적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방대하다. 그는 서적과 일본에서 간행된 전문 잡지 『공예(工芸)』나 『민예(民芸)』에 많이 기고를 했고, 조선 도자기에 일생을 바친 그의 노력에 감동한 가족과 지인들이 담화나 추도문을 발표했다.

노리다카는 또 한국에 있을 때에 일본인 문필가들과 조선인 문인들과 함께 참여해 온『경성잡필(京城雜筆))』이란 잡지에 1920년대부터 1941년 이 잡지가 폐간할 때까지 꾸준히 여러 장르의 글을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글들에서 그는 백자를 비롯한 조선 전통문화에 관한 자신의 깊은 애정과 수준 높은 이해를 잘 드러내 주었다.

노리다카의 뛰어난 감식안과 열정을 증언하는 명품이 있다. 바로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 자랑하는 <청화진사연화문항아리(靑花辰砂蓮花文壺)>이다.

일본에 존재하는 많은 명품 한국도자기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히는 이 항아리는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유백색의 윤기가 있는 바탕에 연꽃의 윤곽을 코발트 안료로 가늘게 그렸고, 충분한 여백을 가진 줄기는 여유롭게 뻗어있다. 

꽃과 봉오리에 칠해진 산화동(酸化銅)에 의한 진사(辰砂)는 농담이 드러나 홍색과 녹색 등 이중으로 발색되어 한층 더 깊은 맛을 자아낸다.

바로 아사카와 노리다카가 소장하던 것으로 항아리를 보관하던 나무상자의 뚜껑에는「영조 전기에 대궐에서 쓴 병(英祖前期大殿用甁). 다카(伯교)」라는 사인과 함께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 노리다카는 ‘이런 종류의 항아리로서는 대작으로, 이 시대의 정점에 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陶器全集17 李朝』1960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0년 서울에 와 다쿠미의 집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이 항아리를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꿈을 꾸는 것 같다’라고 일기에 적으며 그 뛰어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노리다카는 다쿠미, 야나기와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조선의 미를 전함’과 동시에 한일의 사람들이 ‘친하게 만나서 기탄없이 얘기를 나누는 장소’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선 1922년 10월 서울에서「이조도자기전람회」를 열었다. 전시장은 조선귀족회관으로 일제로부터 합방의 댓가로 높지도 않은 귀족 작위를 얻어가진 한국인들이 지금 을지로 1가에 마련한 전용건물이었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