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연재] 딱지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09.0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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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소리 (6)

그 이튿날 아침 정구는 시끄러운 참새소리에 눈을 떴다. 정구는 폭이 세 뼘밖에 안 되는 옹색한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 보았다. 바로 눈앞에 옥상을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훌쩍 큰 오래 된 아카시아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온 동네 참새들이 몽땅 거기 모여 목청껏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참새들은 참새답게 잠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 다니고 날아 다니며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새 중에서도 흔해빠진 게 참새지만 이처럼 많은 참새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참새소리에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이 동네로 이사오기 잘 했지요?
미순이 물묻은 고무장갑을 낀 채 뒤에 와 있었다.
참새들이 웬일이죠?
여기가 아마 참새들 마을회관인 모양이야.
백 마리도 넘겠어요. 참 좋은 동네란 생각 안 들어요?
참새구이에다 소주 한잔 생각이 절로 나는데.
아유 못됐어 정말.

동네 이름이 학동인데 학들은 다 어디 가고 참새들만 남았을까.

이윽고 집회를 마친 참새들이 회오리바람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날아 올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가 멍하도록 주위가 갑자기 적막해졌다. 정구와 미순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아카시아를 내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나 한 집안 식구이면서도 수동씨는 참새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사 오자마자 이런 얘기를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그날 아침 수동씨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용돈 문제였다. 버스를 두 번 갈아 타야 하기 때문에 차비가 곱절로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동씨의 용돈은 하루 5천 원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그 돈을 미순한테서 받아 가지고 나간다. 서로 쑥스럽고 성가신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한 달치 15만 원을 한꺼번에 받아 가서는 일주일도 안 돼 다 써 버린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동씨처럼 할 일이 많고 바쁜 사람한테 하루 5천 원은 너무 야박한 액수다. 차비하고, 차 마시고, 점심과 담배까지 해결하자면 적어도 만 원은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쑥날쑥한 정구의 수입으로는 그마저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정구는 어눌한 시선으로 미순의 눈치를 보았다. 한 마디로 거절할 게 뻔하지만 되도록이면 아버지와 자신의 체면을 살려 줄 수 있는 좋은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 그럼 이천 원 인상해서 하루 칠천 원이면 되겠어요?

수동씨는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춘 셈이다. 미순은 아직도 내 집을 갖게 되었다는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날 아침 외출하는 수동씨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운차 보였다. 환갑도 훨씬 넘긴 남자가 단돈 이천 원 때문에 그처럼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구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또 물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힘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준일 작가/ TV드라마 '수사반장', '형사' 등, 장편소설 '예언의 날', '무지개는 무지개'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