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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춘희 명창 “아리랑 소리극이 꿈, 아리랑 많이 불려지고 들려지기를”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과 성품, 후배들 다양한 활동 참 좋아”
2018년 01월 04일 (목) 14:36:50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press@sctoday.co.kr

경기민요하면 누가 떠오를까? 최근에 국악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희문 소리꾼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희문 소리꾼을 만든 이가 이춘희 명창이다. 유네스코에 아리랑이 등재되기 전부터 그는 국내외 공연에서 항상 ‘아리랑’을 불렀다. 누구보다도 아리랑을 사랑하고 경기민요의 매력을 끊임없이 전했던 이춘희 명창이었다.

최초의 민요 무형문화재이자 지금도 유일한 무형문화재인 이춘희 명창은 아리랑이 계속 불려지고 들려지는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리랑을 소재로 한 소리극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무관심해지고 있는 아리랑.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아리랑의 아름다움을 그에게 들을 기회를 가졌다. 

   
▲ 이춘희 명창 (사진=정영신 사진가)

'아리랑 컨템퍼러리 시리즈 <아리랑X5>'에 참여한 느낌은?

안은미 선생의 공연이 참 감동적이었다. 군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들의 울분을 춤으로 표현하는데 그 아이들의 엄마들이 무대에서 명품 배우가 되더라. 리허설 때 많이 울었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함께 공연을 했는데 바로 내 무대 앞에서 공연을 해서 울음을 참느라 혼났던 기억이 난다(웃음).

아리랑이기에 속에 묻어있는 것을 표출할 수 있고 거기에 감동이 있는 거라고 본다. 나는 소리를 할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줘야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그런 감동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건 죽은 소리다. 한 마디를 해도, 가벼운 손짓 발짓을 해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

‘아리랑 컨템퍼러리 시리즈’ 기자간담회에서 아리랑을 ‘쌀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는데

세계에서 인정해주기 전에 이미 아리랑을 주로 불러왔다. 우리 일상 생활을 보면 쌀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만들지 않나. 쌀로 밥도 짓고, 술도 빚고, 떡도 만든다. 이처럼 아리랑도 정말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소리면 소리, 극이면 극, 무용이면 무용으로 만들 수 있고 소리극, 무용극으로 만들 수 있다. 아리랑이 다양하게 나왔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야한다.

아리랑으로 소리극을 만드는 것은 내 꿈이다. 무형문화재 등재 이전부터 하고 싶었고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맡았을 때는 소리극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는데 제안만 한 상태에서 퇴직해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리랑을 부르는 이들이 많지 않다

아리랑 자체는 참 쉽다. 멜로디가 참 쉽다. 그런데 잘 부르기는 어렵다. 예전에 보면 어느 자리에서 노래를 시키는데 노래 못한다고 하면 ‘하다못해 아리랑도 못하냐’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 노래가 굉장히 어렵다.

쉬운 멜로디지만 그 노래를 제대로 전하는, 감동을 줄 만큼의 테크닉은 전공자, 전문가만이 가능하기에 잘 부르기 어렵다. 섬세함을 표현해야하기에 그렇다. 전공자들은 자기 테크닉에 따라 표현할 수 있지만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은 멜로디를 따라하는 것에서 시작해 학년이 올라갈 수록 자기 기술을 찾도록 하고 있다.

우리가 아리랑을 좀 더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초등학생들에게 아리랑을 알리고 가르쳐야한다. 내가 학생들, 어린이들을 좋아하는데 이 아이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쳐주면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다. 방학에 동네 학교 등을 찾아서 무료 특강을 하는데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 

초등생들에게 아리랑을 자주 들려주고 알려야 한다. 그래야 자라면서 계속 아리랑을 부르면서 탄탄한 뿌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필요한 것이 국악초등학교다. 국악유치원이 시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국악중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유치원도 있는데 초등학교가 없다. 초등학교만 없다.

이러니 유치원에서 전공을 해도 초등학교에 없으니 배운 게 다 사라지고 결국 끊기게 된다. 초등학교가 생겨야 아이들이 전공을 계속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

최초의 민요 인간문화재셨고 지금도 유일한 인간문화재다. 민요가 판소리에 밀린다는 느낌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경기민요가 대세였다. 그때는 라디오가 대세였는데 판소리는 어쩌다 한번 라디오에 나올 정도였다. 민요를 하던 분들은 잔칫집에 많이 불려갔다. 잔칫집에서는 다 민요를 하는 사람들을 원했지, 판소리를 하는 사람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경기민요하는 사람들은 생활이 괜찮았던 반면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생계도 막막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상황이 바뀌었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은 소리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지자 공부만 한 것이다. ‘잘해야 살아남는다’고 믿었기에 공부하고 연구해서 박사도 나오고 좋은 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성장한 것이다.

반면 경기민요를 한 사람들은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생활이 넉넉하니까 연구도 안 하고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판소리에 추월당했고 지금은 오히려 경기민요가 양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민요는 판소리에 30년이 뒤졌다’고 가르칠 때 이야기한다. 의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기민요의 매력은 무엇일까?

판소리가 우직한, 튼튼한 남성의 이미지라면 민요는 보드랍고 연하고 간드러진, 예쁜 여인의 이미지다. 다시 태어나도 경기민요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좋다.

아리랑 하나를 봐도 굽이굽이 흐르는 섬세함이 아주 아름답다. 판소리하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경기민요를 쉽게 생각하다가 결국 ‘너무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목이 안 되는 거다. 

판소리는 거의 통성으로 탁탁 치면서 찌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 외에는 다른 테크닉이 없다. 하지만 경기민요는 굉장히 섬세하다. “머리는 ‘울림통’이다. 이럴 때 비성(콧소리), 요럴 때는 두성(머리소리)을 쓴다” 는 식으로 요소요소에 적당한 소리를 내도록 하니 얼마나 어렵겠나(웃음). 남이 듣기엔 굉장히 쉽지만 배워서 자기가 하려면 정말 어려운 게 경기민요다. 

경기민요는 자칫 잘못하면 천박하게 보이고 들릴 수 있기 때문에 곧은 자세에서 소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소리로 말을 하는 것, 말에 곡조를 입혀 전달하는 것이기에 진중하게 해야한다. 많은 이들이 나를 보고 있기에 신중해야한다.

눈알을 많이 움직이거나 몸을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 팔 하나를 들어도 신중하게 들어야하고 ‘누가 왔나’ 하는 것처럼 눈 돌리고 살피지도 말아야한다. 남이 볼 때 동작도 아름답게, 시선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야한다.

   
▲ 경기민요를 들려주고 있는 이춘희 명창 (사진=정영신 사진가)

프랑스에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후 프랑스에서 공연을 했다. 금강산 타령, 회심곡, 아리랑 등을 했는데 프랑스 관객들이 곡의 내용도 잘 모를텐데 분위기를 어떻게 알겠느냐했더니 자막을 보고 느낌을 알아냈다고 하더라. 

공연한 극장이 마이크가 없이 하는 극장이었다. 내 목소리가 조용하게 전달이 된다는 것이 참 좋았다. 우리는 국악전문극장이 리모델링을 해서 자연음을 그대로 전한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렇게 안 된다. 소리가 모아져야하는데 다 퍼지고 새버린다. 우리 상황에서는 아직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프랑스엔 그런 극장이 있어 좋았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서 불렀다. 부를 때는 좋았는데 다음날 아주 힘들어서 혼났다. 차라기 곡괭이로 땅을 파는 게 낫지(웃음). 아직 더 다듬어야하는 때인 것 같다. 

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2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민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제도가 없었고 정말 제가 좋아서 시작을 했다. 하지만 잔칫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 외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게 막막했으니 얼마나 후회를 하고 갈등을 했는지 모른다. 언제까지 매달려야하는지 혼자 물어보고 ‘다른 일을 했으면 먹고 살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면서 공연을 하면 ‘잘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한번은 TV 프로그램에 나오는데 연예인이 거의 10배의 개런티를 받더라. 거기서 또 한 번 좌절감을 느꼈다. 정말 10년을 쉬지 않고 해왔는데 이런 차이를 봤으니 그럴 수 밖에. 그때도 후회와 갈등을 했다. 그러다가도 소리하면 ‘잘했다’고 자찬하고, 그렇게 후회하고 자찬하고 또 후회하고 자찬하고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스승이신 안비취 선생이 1975년에 보유자가 되고 내가 전수자가 되면서 그 때 마음을 다잡고 소리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버스를 두 번 타야하는 길을 걸어서 가고 제일 값이 쌌던 짜장면으로 계속 점심을 해결했다.

한동안 짜장면만 보면 먹기가 싫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러주는 이들이 없었고...(눈물) 1994년 ‘국악의 해’라고 현수막이 걸렸을 때 그게 너무 좋아서 현수막 보려고 막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바로 그 때부터 너도 나도 찾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밥먹기 시작했다(웃음). 97년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직후 인터뷰가 들어왔는데 ‘달라진 게 있냐’했더니 ‘없다’고 했다. 정말 뭐가 다른 게 있나 싶었다.

그래도 1~2년 지나니 문화재라고 방송도 하고 공연도 하게 돼서 그제야 ‘이제 무형문화재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 무형문화재 전수자 지정 등을 놓고 여러 문제와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참 민감한 문제고 지정이 되지 않은 동료나 선배들을 생각하면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선배나 동료들이 나이가 들어도 조교로 머무는 상황인데 문화재청에서 제도를 어떻게 가지고 갈지 설명회를 하고 그 자리에 참석도 했는데 현실이 냉정하다보니 명예보유자로 올랐어야 할 분이 보유자로 지정된다는 것도 문제가 있고 활동의 문제, 조교들을 해결할 방법도 없는거다. ‘명예보유자 되려고 이제까지 한 것이냐’ 이런 말도 나오는데 참 뭐라고 대답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진작 명예보유자 제도를 했다면 이번 태평무 전수자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명예보유자도 보유자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도록 하고 모든 조건을 다 같이 갖추도록 진작에 만들었어야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무형문화재가 되어야할까?

인성과 성품. 이것이 좋아야한다. 소리는 조금 떨어져도 인성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편견을 가지고 제자들을 대한다면 결국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성품과 인격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제자이기도 한 이희문 소리꾼을 비롯해 경기민요를 다른 장르와 함께 다양하게 표현하는 후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정말 좋게 생각하고 있다.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희문 같은 이는 ‘길을 잘 찾아갔다’고 말해준다. 이희문이 자기 공연에 나를 두 번이나 세웠다. 가발쓰고 공연도 하고 머리에 꽃 달고 빨간 옷 입고 망가진 적도 있다. 이희문의 기를 살려주려고 한 번 망가져봤다(웃음).

한편으로는 본래의 소리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보존은 내가 하면 되지. 이희문 같은 경우는 계속 그 길을 가면 된다. 나처럼 소리를 보존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보존을 하고 후배들은 창조하면 된다.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선생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목소리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한다고 본다. 데리고 있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한다. 가르치던 고등학생을 정가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보낸 적이 있다. 테스트를 해보라고 해서 보냈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아마 잘하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한 아이는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고 전혀 발전이 없어서 충분히 이야기를 하고 ‘너는 안 되겠다’고 말해줬는데 이 아이가 아버님를 모시고 왔다. 아버님이 나에게 절을 하시더라. 하도 아이가 졸라서 가르침을 받게 해줬는데 ‘안 된다’고 말해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무조건 될 거다하는 생각으로 한도 끝도 없이 붙들면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거다. 해서 안 되는 아이는 다른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국악이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다. 앞으로 더 활발해지려면

옛날 식의 소리를 대중들이 좋아하게 하려면 소리극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소리극을 꼭 하고 싶다. 뮤지컬처럼 극의 상황에 맞춘 민요가 나오게 된다면 젊은 관객들도 뮤지컬을 보는 느낌으로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악예술원에서 준비하다가 퇴직했는데 나 혼자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더라. 판소리는 어느 정도 정착이 돼서 무대가 가능한데 민요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게 어렵고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고 개인이 하기에는 돈도 많이 든다. 예산을 타기도 하늘에 별따기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역시 소리극이고 그 외에는 엄두가 사실 안난다(웃음). 소규모 공연단을 만들어 소외 지역 등을 곳을 찾아 순회를 하려고 한다.

많이 듣고 많이 봐야 국악의 운율이 익숙하게 들리고 그것을 알고 배우면 쉬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국악을 접하려하면 참 어렵다. 물론 국악방송이 24시간 국악을 들려주기는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도 국악을 내보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아리랑이 많이 들려지고 불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끝으로 신년 덕담을 부탁드린다

2017년은 좋은 일도 있었지만 시끄러운 한 해였다. 2018년은 밝은 해가 됐으면 좋겠고 모든 국민이 정말 편안하게, 눈과 귀가 다 편안한 한 해가 되기를 빈다. 다들 건강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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