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아사카와 노리다카, 조선에 빠지다(2)
[특별연재] 아사카와 노리다카, 조선에 빠지다(2)
  • 동산 이동식/언론인 ·저술인
  • 승인 2018.01.2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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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반도에서 보내며 조선의 전통 문화 연구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펼쳐
▲ 동산 이동식/언론인·저술인/현 KBS 비즈니스 사/2010.06~ 제7대 한국불교언론인회 회장/KBS 정책기획본부 본부장 역임

노리다카는 여기에 이 항아리를 앞 열 중앙에 놓아두었다. 그만큼 자랑하고 싶었던 항아리였다. 세 사람은 조선민족미술관의 개관을 위해서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이들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마침내 1924년에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하게 되었다.

야나기는 이어 일본에 가서도 일본민예관을 세워 1936년에 문을 연다. 여기에도 사실은 대부분 조선에서 수집한 작품들이 상당부분 채워져 있다.

노리다카의 공적

아사카와 노리다카는 단순히 조선시대 백자의 아름다움을 발굴해낸 것 이상으로 이 도자기들의 연대분류도 처음으로 해낸 것이 중요한 공적으로 남는다. 일본에서는 1930년대에 조선의 도자기들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모으는 일대 붐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다쿠미, 그리고 야나기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야나기가 펴낸 잡지 『시라카바(白樺)』는 1922년에 「이조도자기특집호(李朝陶磁器特輯号)」를 냈는데, 노리다카는 여기에 「이조도자기의 가치 및 변천에 대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조선의 도자기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참으로 고유의 색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고 그 특질을 보면 “중국의 것은 이성(理性)이 강하지만 조선의 것은 인정미가 강하게 있다”라고 했다. 

특히 노리다카는 조선 도자기의 시대구분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1. 조선 초기: 미시마(三島)전성시대
2. 조선 중기: 카타테(堅手)백자시대
3. 조선 후기: 청화백자(染附) 전성시대 
4. 조선 말기: 

이렇게 시대구분을 한 것은 노리다카가 처음이다. 그가 돌아 본 각지의 가마터와 채집한 도편들을 연구한 결과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고려시대로 보았던 분청의 제작연대를 조선시대 초기로 정한 것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에는 고고학적인 발굴이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지금 봐서도 수긍할 정도의 시대구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리다카가 명문(銘文)으로 추정하고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파편들에서 이를 맞추고 확인하는 등 주도면밀한 작업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어서, 그가 진정으로 조선의 백자를 사랑했구나 하는 증거로서 후대인들의 칭찬을 받는 부분이다.

그런데 짚고 넘어갈 것은, 조선의 미술공예의 가치를 최초로 인정한 것은 노리다카가 아니라 당연히 조선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아사카와 타쿠미 평전을 쓴 다카사카 소지도 한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최하림崔夏林의 글을 인용해서 이같은 사실을 인정한다.

1920~30년대의 고미술 붐도 사실은 ‘충실한 생활을 하자’는 일본 식민통치 특권계급의 취향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이와 같은 유행에 최초로 불을 지른 것이 노리다카, 타쿠미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 등이었다.

물론 옛 도자기나 고서화의 진가는 수장했던 사람들의 낙관으로부터도 잘 알 수 있듯이, 김정희金正喜, 오경석吳慶錫, 민영익閔泳翊, 민영환閔泳煥, 오세창吳世昌, 김용진金容鎭 등의 수준 높은 감식가들이 이미 확인한 바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고미술의 진가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들의 입장 에서 말하는 ‘발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백자의 아름다움에 처음 눈을 뜬 노리다카 덕분에 조선의 백자는 세계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게 된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에게 고려청자의 제조법을 가르치고 청자의 파편들을 보내어 공부를 하게 했다.

▲ 노리다카 다쿠미 형제

1912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렸던 척식박람회에서 이왕가컬렉션의 조선 도자에 관심을 보였던 리치는 1920년 직접 조선을 방문해 이왕가박물관을 관람했다. 리치는 고려 청자의 아름다운 빛깔과 조선 백자의 고요한 선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는 <이조의 백자>라는 책을 출간했다. 버나드 리치가 이 책에서 동양도자의 특색을 ‘한국은 선이고 중국은 색채이며 일본은 모양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에 높이 47센티의 달항아리를 구해 안고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돌아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그 달항아리는 후손에 의해 경매에 나왔다가 한국인이 기부금을 써서 현재 대영박물관 한국관에 전시되고 있다.

리치 외에도 또 조선백자의 정신세계를 이어받아 형태와 선, 색감 등을 재현한 일본의 도예가 도미모토 켄키치(富本憲吉. 1886~1963)와도 친교를 맺어 그가 백자에 귀의하는데 역할을 했다.

조선의 풍속화나 민화에도 관심

노리다카는 조선의 풍속화나 민화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면 신윤복申潤福(1758~미상)을 가리켜 “조선의 자연을 응시한데서 생겨난 그림으로서,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 전적으로 조선의 감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조선의 독보적 풍속화가라고 생각한다“ 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예술이 중국 예술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에 노리다카의 이런 지적은 그의 눈이 편견에 물들지 않은 정확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한국 사랑

노리다카는 조선도자사의 연구가인 동시에 수집가이기도 했고 도예가였으며 조각가였고 또 다도를 즐기는 다인이었다. 때로는 시인으로서 와카나 단가 등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 시 속에서 노리다카는 한국의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남긴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여과없이 드러내었다. 

“항아리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들어오는 음악이다. 
아름다운 형태,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그림. 
아침부터 밤까지 빛의 변화를 받아 삼부 합창을 하고 있다“
壺の美は目から入る音楽だ 美しい形 美しい色 美しい上絵
朝から晩迄光の変化を受けて 三部合唱をやつて居る.

                                 (시 「항아리」 노리다카 1922년 작)

노리다카는 백제의 옛 도읍 부여를 자주 방문하여 ‘부여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말하곤 하였다. 거기에는 고향 선배 고미야마 세이조(小宮山清三:1879~1933)의 형이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 형의 농장에 다녀온 고미야마가 조선의 미술품을 들고 집에 돌아온 것을 노리다카가 보고서 조선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게 되었음은 앞에서 말한바 그대로이다.

▲ 노리다카가 그린 부산요

그런 인연으로 고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의 고도 부여를 자주 찾고 또 시도 몇 편을 남긴다. 1930년 일본에서 『일본지리대계 조선편』(改造社)가 출판되었다. 노리타카는「부여 부분」을 담당하여 부여의 수북정(水北亭), 낙화암, 백마강, 구룡평(九龍坪), 규암진(窺岩津), 고란사(皐蘭寺) 6곳을 골라서 해설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일본에 온 백제의 학자, 명승, 공예가 등 문화인은 이러한 멋진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다 ”라고 덧붙이며 부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다. 때로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조각구름만 강에 남긴 채 물새가 산을 넘고 넘어가는 거기 백제의 벌판”
ちぎれ雲水に殘して水鳥は 山をむれ越す百濟國原 
                 단가 「부여」 1935년 출간 『조선풍토가집』 수록

“왕궁의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이 저기 아이들의 모습에 문득 보여지는 듯” 
王宮の聖の御子のをさな姿そこらゆく子にふと思ひ浮ぶ 

           단가 「부여」 1935년 출간 『조선풍토가집』 수록

“왕궁의 돌로 보이는 유물들이 여기저기서 다리가 되고 절구가 되기도” 
王宮の石と思しき 散らばりて橋ともなりぬうすともなりぬ
                단가 「부여」 1935년 출간 『조선풍토가집』 수록
(**여기에 소개되는 단가와 노리타카의 활동소식은 언론인 노치환 씨가 준비 중인 책 “西山너머 샹그리라 코리아(가칭)”에서 일부 미리 전재했음을 밝혀드립니다. -저자 주-)

1920년 노리다카가 도쿄에서 열린 제국미술원 전람회의 조각 부문에서 «나막신을 신은 사람»이라고 이름 붙인 조선인 남성상으로 조각부문 입선을 하고나서 신문사와 한 입선 인터뷰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친선은 정치나 정략으로는 안 된다. 그들의 예술. 우리의 예술로 서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성일보」 1920년 10월13일자

1921년 2월, 아마도 음력으로는 설이 가까울 무렵 노리다카는 석굴암에서 하룻밤을 잔다. 새벽에 법당에 나가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는 석가모니 부처상을 보며 이렇게 감격한다.

천개(天蓋) 밑은 완전히 아침이 되었다. 
제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한층 깨달음을 얻게 되어 
법열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길로 걸음을 향하게 된다.
모든 선과 음영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아름다운 빛의 교차
천개의 밑은 마치 음악당이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존귀한 빛의 음악이다.(중략)
아시아 대륙은 이 불타 백호의 빛을 시작으로 밝아져 간다.
나는 영원 앞에서 산 불타의 설법을 듣는다,
이처럼 두려운 구도가 어디에서 생겼던가?
이처럼 아름다운 선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이곳에 옛 공인들을 생각하고 동양의 위대함을 생각한다. 
                        『朝鮮』 1923년 3월호, 129~134페이지

고적이나 잘 모르는 해안에 서서 큰 운명에 휩싸여 지금의 내가 이 땅에 온 섭리의 불가사의에 감동받으며 깨끗한 마음이 되어 홀로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습니다
                   浅川伯教(1926) 「正月と旅行」『京城雜筆』83号, 京城雜筆社, pp.38~39


그야말로 한국과 한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의 경지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일본 입장에서는 종전終戰, 혹은 패전敗戰)이 되고서도 그는 조선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 점령군 하에서도 그는 그의 연구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조선 체류를 허락받았다.

그는 조선민족박물관의 수장품을 송석하가 새로 설립한 국립민속박물관에 통합시켰다. 일본인 수집가들이 조선미술 공예품을 일본으로 빼돌리느라 정신이 없을 때, 그는 개인 소장의 공예품 3천여 점과 도편 서른 상자를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946년 그는 33년에 걸친 조선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 도자기와 일생을 같이 한 그는 1964년 늑막염으로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진정한 친구-일본인 거리 피해 조선식 가옥서 살면서 바지저고리 입고 거리 돌아다니기도

우리들은 최근에 아사카와 노리다카의 동생인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해서는 책도 나오고 그를 기리는 행사나 글도 많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일찌기 우리나라에 와서 청량리 근처 한국 사람의 집을 얻어 한국식으로 살면서 한국 옷에 한국 음식을 먹는 등 완전히 한국 사람으로서 살다가 갔고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히기를 바랐기에 그의 무덤이 지금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노리다카는 다쿠미의 형으로서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더 다양한 활동을 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충분히 조명되지 않고 있다. 노리다카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란 뜻이다. 

▲ 노리다카 데드마스크_1931

노리다카는 조선의 백자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일본을 통해 세계에 알린 사람일뿐 아니라 도자기 역사의 발굴과 정리, 한국 민속에의 관심,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 등 어느 하나도 동생보다 못한 것이 없고 나아도 한참 나았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정도이다.

노리다카는 1922년 9월『시라카바』지에 「조선시대 도자기의 가치와 변천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역사에 대해서 쓰여진 최초의 논문이었고, 그 때까지 고려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던 분청사기가 조선시대의 것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 논문은 높은 평가를 받아서 그해 11월에는『동명』이란 잡지에 「조선시대 도자지의 史的 고찰」이란 제목으로 고쳐 실리면서 조선 도자기에 눈 든 사람들이 많아졌다. 1926년 5월는 조선 예술잡지로 창간된 월간예술지 『아침朝』에「조선시대 백자항아리」를 발표하고 그 잡지 표지의 그림과 장정까지를 도맡기도 했다. 

그는 조선 사람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일본인 거리를 피해서 조선식 가옥에서 살면서 때로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 잘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사람과 조선말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인 거리를 형성하고 조선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않았으며 몇 십 년이나 조선에 살면서도 조선말을 배우려고 하지 않은 때였다. 일찍이 1914년 노리다카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당시 경성에 살았던 시라토리 큐조(白鳥鳩三)의 회고록에 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기묘한 차림새의 일본인이 찾아와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모시 바지 저고리를 입은 그 사람은 꾀죄죄한 잿빛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이다.(자전거도 없었나, 그 시대에?) 잘은 모르겠지만 서대문 형무소 뒤에 경성의 3대 명 약수 중 하나가 나는 샘이 있어 매일 아침 그것을 마시러 다니던 중에 우리집 문패가 눈에 띄어 ‘이런 곳에도 일본 사람이 살고 계신가 하고 반가워서 찾아 왔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 사람이 훗날 조선시대 도자기 연구로 명성을 떨친 아사카와 노리다카 씨였다. ” 

그는 자신이 연구한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한국 도공들에게 전한 분이기도 하다. 한평생 고려청자를 연구하고 제작한 도예가 지순탁(池順鐸, 1912~1993)은 1928년 골동품점에서 노리다카를 알게 되어 “자네와 같이 뜻 있는 청년이 많이 나와서 이러한 문화유산을 다시 창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하는 그의 말에 자극을 받아서 끊겼던 고려청자의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결의를 굳혔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동안 노리다카와 함께 약 30군데의 가마터를 조사해서 고려청자를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1944년 가을 지순탁이 처음으로 구운 청자 향로를 20엔에 사주며 격려한 것도 노리다카였다고 한다. 

그는 해방 후에도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또 이를 한국에 인계하기 위해 1년쯤 더 있었다. 그는 머물 수 있을 때까지 한국에 더 있고 싶어했는데, 미군이 진주해 군정이 시작된 뒤 그의 조선미술공예연구실적을 높이 평가 받아 1946년 11월까지 특별체류허가를 받아 그 사이에 그때까지의 연구를 정리하고, 야나기나 다쿠미 등과 만든 조선민족미술관을 지키고 있다가 송석하(宋錫夏)가 설립한 민족미술관에 무사히 흡수시켰다.

또 자기 개인 소장의 공예품 3천여 점과 도편 30상자를 민족박물관에 기증했다. 당시 대구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등 일본의 유력 수집가들은 수집품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사람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책쓰기와 전시회 열어 조선도자 알리기 활동 계속

1946년 11월 3일 노리다카는 하카다(博多)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가 1949년에는 치바(千葉)시에 정착해 도자기 손질, 다도, 단가(短歌)나 하이쿠(俳句) 쓰기 등을 열심히 하며 조선 도자기에 대한 책을 쓰고 전시회를 여는 등 조선의 도자기를 알리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64년 1월 80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가장 한국인을 사랑한 우리의 일본인 친구였다. 그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이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약탈했는가도 기록해 놓았고 부산요(釜山窯)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이 어떻게 일본을 통해 세계로 수출했는가를 가장 상세하게 밝혀놓았고, 절친한 친구가 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미에 대해 비애(悲哀), 곧 슬픔의 역사에 의한 비애(슬픔)의 미로 보았지만, 노리다카는 이를 그렇게 보지 않고 샤머니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등 독자적인 시각을 밝히기도 했다. 

야나기의 ‘비애의 미’론이 틀렸다는 것은, 1976년 최하림이 야나기를 비판한 논문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관韓國美術觀」이 소개된 이래 일본에서도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야나기의 ‘비애의 미’론이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같은 일본 사람인 노리다카가 이런 독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리다카가 조선 민중의 생활 속에서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 도예가 가와이 간지로 “아사카와 씨 등이 매사에 그것에(한일합방 후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편집자 주) 대한 속죄를 하던 일을 상기, 정복자가 패자에 대해서 저지른 과오, 그런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 주신 분들” 

일본의 도예가인 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는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다쿠미 형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우리(일본) 동포가 그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던가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아사카와 씨 등이 매사에 그것에 대한 속죄를 하던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복자가 패자에 대해서 저지른 과오, 그런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당신들이야말로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 주신 분들이었음을 새삼 알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필자는 일제시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을 때에 한국인의 친구가 된 일본인들을 찾아보면서 그를 맨 첫 머리에 올린 것이다.

아사카와 다쿠미나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인물이 바로 이 노리다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그는 근세 이후 한국인의 첫 번째 일본인 친구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이 글은 필자 이동식 저 『친구가 된 일본인들 1편 아사카와 노리다카』 편에 실린 내용을  발췌해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