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 “내가 작품을 만드는 힘, 애절한 기도다”
[특별인터뷰]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 “내가 작품을 만드는 힘, 애절한 기도다”
  • 인터뷰-이은영 발행인/ 정리-임동현 기자
  • 승인 2018.03.0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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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닌 타 생명의 시선에서 본 산수 그려, 생각을 열어놔야한다”
▲▲ 박대성 화백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 오는 4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전시회 제목이다.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박대성 화백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림과 서예 등 다양한 작품들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수묵화, 산수화의 새로운 매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고, 진경산수에 머물지 않은, 색다른 시각의 산수화는 우리 회화의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모습으로 현대의 관객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6.25 당시 부모를 잃고 한쪽 팔까지 잃었지만 그는 노력과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국선 입선을 8번을 했고 한국 산수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발돋움한 원천에는 ‘불편당’이라는 이름과 핸드폰을 없애면서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한 노력과 함께 애절한 기도, 자신보다 국가와 동료를 위하는 기도가 원동력이 됐다.

경주시는 보문단지 내에 박대성 화백을 위한 ‘솔거미술관’ 을 지어서 박 화백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리고 있다.

그림으로는 설명이 부족했을 소산 박대성 선생의 예술관을 이제 귀기울여 들어볼 때다. 이례적으로 인사아트 전관에 걸쳐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대규모 전시장에서 지난 2월 말 그를 만났다.

▲ 박대성 화백


이번 전시의 제목이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다

<천지인>, <금강화개> 같은 역사는 우리 미술 역사에서 파격적인 변천이다. 조선 회화가 5,6백년이 지나도록 변화가 전혀 없었다. 동아시아 회화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말하는 ‘시대정신’을 담지 못하고 답습에 그쳤다. 나는 그것을 타파한 사람이다.

타파가 다는 아니지만 뭔가 21세기에 과거 이야기만 해서는 안된다. 완전한 원의 세계를 이루어야한다. 불가의 공(空)의 세계. 실제로 공을 만들어야한다. 그에 준하는 작업이 무엇이나면 기도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든 카톨릭이든 기도는 같은 것이다. 40년 이상을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그것이 내 엄청난 에너지고 그 에너지가 축적됐기에 작품을 남기고 지금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최고의 목표는 기도다. 기도와 글씨가 맞물리면서 붓이 움직인다. 붓을 잡은 것이 나로서는 행운이다.

붓은 정신성이 없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물질적인 것을 반대한다. 표현도 물질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원시로 돌아간다는 느낌으로 하고 있다. 재료를 이것저것 쓰고 엄청나게 쓰는 경우가 많은데 난 그런 것엔 취미가 없다.

먹을 금쪽처럼 써야한다. 언제가 마지막일지는 모르지만 먹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릴 때 완전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박대성 '효설(曉雪)', 235x780cm, Ink on paper, 2018

재작년 솔거미술관에서 대대적인 전시를 했다. 이번 전시를 하면서  ‘내 작업을 다 보여준다’고 했는데

차곡차곡 걸어온 길 보여주는데 이제 뭐가 좀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공략해야 무엇이 나온다는 것, 박대성의 총괄적인 것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보이는 것이다. 작업을 위해 핸드폰도 없앴다. 선후배들에게 연락 못 받는다고 미안하다고 했다(웃음).

그분들에게 언젠가는 보답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부끄러움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길을 가기로 했다. 모든 것을 다 집대성한 것을 이번에 다 보여준다고 한 거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았을 시절이었는데 주변 어르신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고 들었다

그림을 흉내내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만약 그 때 어른들이 반대하고 멸시했다면 이 일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마다 다들 잘한다고 칭찬해줬다. ‘이 아이가 소질이 있어’라는 말 한 마디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래서 어린 시절의 교육이 중요한 거다. 그 순간에 받는 칭찬 한 마디가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당시 어르신들이 솔거 이야기를 해줬다. 집안이 가난해 지필묵을 살 돈이 없어 땅바닥에 숯으로 그림을 그리고 신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그 이야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는 어린이 교육에 신경을 써야한다. 아이들이 소질이 있다. 기성보다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 미술의 미래가, 우리 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선생의 작품을 보면 서예를 그림에 투사한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겠다.

그림과 서예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글씨를 잘 쓰면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면 글씨를 잘 쓰게 된다. 실크로드에서 바위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고 계속 스케치를 하보니 '상형문자들이 글씨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에 글씨가 온 거라는 생각. 그러다보니 서예의 기법이 곧 그림의 기법으로 이어지더라. 서체를 연마했더니 그림이 됐다. 그게 내 그림이다.

▲ 자신의 그림관을 밝히는 박대성 화백

작품 '효설(曉雪)'에서 솔이 탑을 두 팔로 감싸며 보호하려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인상적이다.

솔과 탑은 불가분의 관계다. 내가 경주에서 20년을 살고 있는데 솔과 탑이 정말 잘 어울린다. 경주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인데 가장 잘 어우러진게 솔과 탑이다. 우리 강산이 정말 아름다운데 솔이 그 중 아름답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가사가 바로 경주 남산의 소나무를 말하는 것이다. (경주가 수도인) 신라가 문화를 다 받아들이지 않았나. 당나라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유럽까지 영향을 끼쳤다.

선생만의 특별한 산수화 기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겸재 정선의 작품에 매력을 느꼈는데 그 매력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양을 가지고 금강산을 표현하는데 나는 음양도 중요하지만 현실의, 내가 아는 타 세계의 생명들이 보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지, 다른 동물과 사물의 시각에 관심을 쏟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금강산 독수리가 내려오면서 본 것을 부감법으로 그린 <천지인>이다.

동해와 금강산은 맞물려있다. 물고기가 금강산을 보는 시선을 그려냈는데 저 산의 이름이 왜 금강산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여다보니 음양의 대변화가 있더라. 그래서 금강경에서 이름이 나온 것이라고 봤다. 금강경을 떠올리며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게 <금강화개>다.

생각을 열어놔야한다. 실경산수지만 다른 개체에서 바라본 시선을 내 인식으로 가져가서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하려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변화를 주려 한 것이다.

독도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종상 선생과 독도 모임회를 하게 됐는데 경주에 가니 경상북도가 독도에 속해있어 지사님이 특별한 관심 가지고 독도 행사를 많이 했다.

그 때 생각한 것이 <삼국사기>였다. 문무왕이 죽으면서 화장을 해서 대왕암에 뿌리면 용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애절한 유언을 했는데 그것이 생각나 청룡의 여의주를 일장기로 표현해 일본을 잡겠다는 의미의 그림을 그렸다.

내가 6.25 때 부모님을 잃고 한 팔을 잃었는데 물론 6.25가 남북한의 싸움이긴 했지만 그 이전에 일제 강점기가 있었기에 비극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원한도 그림 속에 포함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통해야한다는 뜻도 있고 제발 반성을 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천지인>

한 팔이 불편해서 ‘불편당’이란 호를 스스로 붙이기도 했는데, 작품을 하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많이 그려냈다.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결국은 노력이다. 극복은 노력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도가 가장 큰 에너지였다. 언제나 작업을 해도 피곤하지 않고 신이 난다. 기도할 때는 나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내 친한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

젊은 시절 국전에서 무려 8번을 입선했다. 사실 당시는 제도권 교육 기관의 사람들이 좌우지 할 때인데,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여러차례 입선을 했는데,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뒤 국전에 낙선을 시켰다. 특선까지는 못 준다, 건방지다 이거지(웃음).

그 때 이병철 회장이 ‘국전을 능가하는 것을 하나 만들라’고 해서 중앙미술대전이 만들어지고 1회에 장려상, 2회에 대상을 받았다. 상금도 파격적이었다. 당시 교육을 받지 않은 이가 정규 교육을 받은 작가들을 제치고 상 받았다고 신문 사회면에 났더라(웃음).

국전에서 떨어진 것이 화가 났지만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살면서 뭔가 시련이 있어야한다고 본다. 너무 편하면 안 된다. 천적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

▲‘법의’ (325×270㎝, 2010).

국전 입선 후 대만 유학을 다녀왔는데 이것이 변화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만에서 한국의 전래 미술에 대한 꿈을 깼다. 우리는 너무 소규모였고 사물을 가져오는 데생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중국 미술은 섬세하고 크든 적든 완벽함을 갖췄다. 이 길을 가야할 지 고민하고 매우 힘이 들었다. 마지막 결심은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대만은 풍토가 다 달랐다. 새로 그림을 시작했다.

전래의 미술이 수묵인데 나는 그동안 채색을 본 적이 없었다. 도시에 나와 수채화 보고 유화를 처음봐서 상당히 어려웠다. 앞으로 4차원 세대에는 다양한 매체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간단 명료한 수묵의 세계가 엄청나다.

한국화가 경매에서 서양화에 밀리는 등 하향세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화가 살아날 방법은 무엇인지

90년대 중반 뉴욕에 있던 시절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를 가르친 중국 작가가 내 그림을 훌륭하다고 엄청 칭찬했다. ‘잉크가 무슨 잉크냐’ 처음 본다는 거다.

그 때 현대고 고대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 현대미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명천지 뉴욕에서 중국 아티스트가 먹과 붓을 모르고, 먹그림을 보고 놀라워하는 것을 보고 바로 경주 불국사에 갔다.

불국사 안에 들어가서 관음을 보고 전율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절에 방을 얻고 그린 것이 ‘불국사 시리즈’다. 간절함과 애절함이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미국에서 느낀 것은 모든 생각과 모든 내 삶을 간단하게 단순하게 하면서 깊은 느낌을 줘야한다는 것이었다. 회화의 기본은 데생이다. 사물을 보는 기술을 가져야한다.

무엇보다 기초가 안 되면 아무것도 안된다. 기초가 없이 어떻게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 금강화개, 197x216cm, Ink on paper, 2018

부인이신 정미연 작가가 성화(聖畵)를 통해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나와는 작품 세계가 전혀 다르다. 같으면 결국은 싸움거리가 된다.(웃음) 아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작가로서도 자기세계가 뚜렷하고 작품도 훌륭하다. 정작가는 여고 때 전국대회를 휩쓸었던 천성적으로 타고난 화가다. 그 실력이 내게도 큰 자양분이 됐다. 나는 더 심하게 말해 정규 교육 과정이 없이 작가가 됐기에 정규 교육을 받은 정작가가 받쳐줘서 물만난 고기가 됐다. 특히 서양화를 해서 구도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큰 영향을 줬다. 김환기에 있어 김향안이 있어 걸출한 화가가 된 것처럼 내게 아내는 내 몸과 같은 헌신적인 사람이다. 늘 마음속 깊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좋은 작품 하는 것이 꿈이고 전통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이 꿈이다. 수묵만 주장하지 않는다. 한국화의 원형을 알리고 싶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후학들을 위해서 한국화를 이어가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모던 아트가 어디에서 나왔는줄 아는가? 바로 아프리카의 민화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4차원의 세계는 우리의 민화에서 자양분을 얻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민족은 참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도 정말 특별한 민족이다. 그들의 음악과 우리의 가락이 참 비슷하다. 아프리카 민족은 가슴이 뜨거운 이들이다.

인간은 가슴이 뜨거워야지 차면 안된다. 가슴이 뜨거워야 예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