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평창올림픽에 투영된 문화강국의 저력
[성기숙의 문화읽기] 평창올림픽에 투영된 문화강국의 저력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3.1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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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숨가쁘게 달려온 17일간의 지구촌 축제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세계 92개국에서 총 2920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등 겨울올림픽 사상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알다시피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남북대치 상황과 북핵 위협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의 참가를 이끌어냄으로써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져 퍽 다행스럽다.

올림픽 기간 북한의 김영남과 김여정, 현송월의 방남은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정치권의 공방과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한 2030세대의 분노 표출은 평창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불투명하게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올림픽은 개최국의 국가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예컨대, 1965년 도쿄올림픽은 쇼와 천황이 개회선언을 함으로써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가의 굴레를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일본은 세계 최초 고속철도인 신간센이 개통되고 칼라TV 송출을 통해 전자기술의 강국임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중국굴기(中國崛起)를 표방한 2008 북경올림픽은 이른바 중화(中華)의 부활을 예고했다. 장이머우 감독이 총연출한 북경올림픽 개막식 행사는 무려 1억 달러가 투입되는 등 대국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한자문화권 고유의 깊고 넓은 문화자원에 토대한 장대한 스케일과 스펙타클한 공연으로 중국이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국가로서의 자존감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88서울올림픽 역시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근대이후 한국은 일제 식민통치, 전쟁과 분단,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후진국에 머물렀고 빈곤한 저개발국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후진국에서 탈피했고 산업국가로 진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강에서 펼쳐진 강상제(江上祭)를 서막으로 예술적 역량이 총집결된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은 문화강국의 이미지와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드높였다.

2018 평창올림픽의 성공 요인은 문화올림픽으로 귀결된다. 올림픽 개·폐회식은 개최국의 국력과 문화적 저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장이다. 평창올림픽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과 기술이 융합되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 세련된 무대로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임을 새삼 일깨웠다.

백호와 단군신화의 웅녀, 하늘과 사람을 매개하는 인면조 그리고 금동대향로, 석굴암, 달항아리, 거북선, 꼭두와 상여 등 5천년 민족문화의 상징이 대거 동원됐다. 1395년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 별자리가 입체영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을 순식간에 감싸는 장면은 개회식의 하이라이트로 시종 탄성을 자아냈다.

세계인의 시선을 강탈한 드론과 최첨단 디지털 아트로 펼쳐진 메밀밭, 평창의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 쇼 등 제4차 산업혁명 기술을 구현하면서 IT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특히 K-POP 아이돌그룹 엑소의 공연은 한국문화의 자산인 한류의 실체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였다. 강원도 시골마을 다섯 아이의 모험,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의 합창은 따스함이 묻어난 훌륭한 퍼포먼스였다.
 
개막식의 ‘평화의 땅’은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에 투영된 고급한 품격의 귀족문화가 현대적 미감으로 되살아난 무대였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궁중의상의 활옷을 착용하고 시종 아정(雅正)한 움직임으로 장엄미를 선보였다. 물방울무늬 의상을 착용한 긴 소매춤 형상은 고구려 고분벽화 속 무희들이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최고령 출연자인 김남기 옹은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이 스며있는 정선아리랑을 구성진 목청으로 처연하게 불러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하얀 메밀밭 풍광이 묘사되고 정선아리랑의 묵직한 선율에 다섯 아이를 태운 뗏목이 메밀밭을 헤치고 들어오는 장면은 서정적이면서도 경이로웠다. 근현대 질곡의 역사가 흐르고 휴머니즘이 살아 숨 쉬는 명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폐회식 무대에 선보인 화려한 군무로 펼쳐진 장구춤도 예사롭지 않은 미감을 선사했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장고가락과 일체감이 돋보이는 춤사위는 압권이었다. 연주자들의 의상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면서 그려낸 태극문양은 한국적 아이덴티티를 함축한 좋은 본보기였다.

최고의 테크닉을 자랑하는 LDP무용단의 ‘새로운 시간의 축’은 섬뜩한 전율을 안겨줬다. 올림픽 개·폐회식 무대라는 중압감 속에서도 기대치 이상의 역량을 과시한 안무가 차진엽과 김혜림이 자랑스럽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문화올림픽으로서 평창올림픽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문화강국의 저력을 대내외적으로 선보이며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는 본래 의도에 충실했던 행사였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싼 냉각기류가 고조된 가운데,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의 방남과 현송월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의 한국공연은 무엇보다 이후 남북 긴장완화를 위한 유의미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란 점에서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김정은식 ‘음악정치’의 선봉장 현송월의 지휘아래 방남한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프로그램은 클래식과 한국 인기가요, 무용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클래식 연주솜씨는 단연 수준급이었고 한국 인기가요를 부를 땐 음정은 다소 낯설지만 세련된 무대매너 속 감춰진 호기심을 엿볼 수 있었다.

유일한 무용프로그램 ‘달려가자 미래로’는 김정은시대 대표적 체제선전용 작품으로 한국 걸그룹의 몸짓을 모방한 듯 보이며 전체적인 안무와 움직임은 철지난 유행가처럼 복고풍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문화예술 영역의 소박한 몸짓들이 남북 평화통일의 마중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