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주의 쓴소리] 우리춤과 무용의 매력 그리고 바램
[최창주의 쓴소리] 우리춤과 무용의 매력 그리고 바램
  • 최창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대행)
  • 승인 2018.03.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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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대행)

춤과 무용은 연희(演戱)로서 문화예술을 공연하는 행위다. 연(演)은 화살과 희(戱)는 창이고 극(劇)은 칼을 뜻하는 한자(漢字)적 해석이다.

즉 무기로서 전쟁(戰爭)을 말할 수 있는데, 원시시대는 자기씨족과 부족(部族)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의 전쟁이 우선이었고 식(食), 의(衣)와 놀이의 수단으로 사냥을 하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즐겼다.

사냥으로 배불리 먹게 되니 어깨춤이 저절로 나오고 흥(興)과 표현(表現)의 자연스러움이 몸짓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신(神)을 즐겁게 해줌으로서 노여움을 풀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강신(降神:내림), 오신(娛神:찬양), 송신(送神:보냄)의 뜻으로 오늘날 연결되어 있다. 

이런 숭배의식 속에 '기도(祈禱)하는 춤'이라함은 태초의 움직임을 말할 수 있는데 반주음악이라야 나무때기, 돌, 그릇, 사람소리(口音), 자연에서 나오는 소품 등의 도구들이었다.

시대가 변화하게 되면서 오신(娛神)에서 오인(娛人)으로 보여주기 위한 개인춤, 군무와 단체춤, 탭댄스, 왈츠, 차차차, 사교댄스, 즐기기 위한 춤 등, 민족별로 고유(古有)의 춤으로 각기 다르게 멋과 맛과 매력적으로 발전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연(自然)에서 오는 색깔, 호흡의 숨결, 시선, 움직임의 품격(姿態) 등은 발걸음의 움직임, 걸음걸이부터 몸짓춤이 동작의 원리로 진행됐다. 

춤은 우선 몸 전체로 흥겹게 움직여주는 몸짓이어야 하겠다. 그 움직임이 음양(陰陽)의 조화(調和)가 어둠과 빛이 되어 시냇물에 비치는 자연(하늘, 땅, 물, 불)의 태양은 곡선과 직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생활이 진행되면서 직선과 곡선의 만남으로 모든 사물(事物)을 나타나게 되는데 직선(直線)은 비극일 때 동작선이 나오고, 희극적일 때는 곡선(曲線)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분리되어 남녀(男女), 동서양의 만남, 인간의 만남도 전통(traditional)과 변화(혁신,innovation) 두 가지 용어(用語)가 나타난 것처럼 두 줄기가 있어 예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있고, 현 시대에 맞게 아름답게 재구성되어 소통하는 것이 있다. 

즉, 문화정책(文化政策)의 기본(基本)으로서 요즘에 와서 법적인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와 무대적 변용으로 창작적(創作的)인 것을, 분간 못하는 자유인(自由人)이 있다.

따라서, 춤은 굴신의 몸짓춤이고 무용(舞踊)은 아름답게 감정을 꾸미는 것, 안무(按舞)는 한 작품을 만들 때, 작곡 및 편곡인 music의 템포와 리듬을 통해 무용수의 이동을 배열시키는 예술이다. 어둠과 빛, 아첨과 권력, 비판(批判), 지옥과 천국(善과 惡), 풍자(諷刺)와 해학(諧謔) 등이 움직임을 통해 생활에서 위치선정(位置選定)이 된다.

앞으로 움직임의 생활이 4차 산업(인공지능) 시대가 되어 인간의 노동력은 점점 필요가 없어지고 예술치유를 통해 문화 복지와 예술의 발전으로 이제 지역사회가 개인주의보다 어울림의 공동체 형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 춤꾼들의 모임은 현재 무용협회와 춤 협회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다. 무용과 춤 무엇이 다르기에 하나는 한자어인 무용으로, 둘은 순수한 우리말로 구분 짓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러한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신문이나 동경유학생 일본 권번에 의해 쓰여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舞와 踊은 원래부터 발을 땅에 짚고 선회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舞가 고전적이라면, 踊은 일종의 亂舞인 근세적 감각이 있다. 춤이란 감각기관을 향한 다차원적인 현상으로 어떻게 느낌이 오느냐에 따라 팔다리의 위치가 달라지고 표현이 다양해진다.

필자가 예그린악단 단원일 때, 탭댄스, 스페인 춤(쥬리), 발레(임성남), 일본의 봉오도리(白成珪), 한국무용(김백봉, 송범, 예그린과 국립에서 배움), 포크댄스(78년 유럽CIOFF 축제 참가) 등을 직접 배웠다. 무용계 선학들의 글을 보면, 궁중무용, 민속무용, 향토무용, 의식무용(태평무, 화관무, 춘앵무, 처용무, 승전무) 등 舞踊이라고 했지, 춤이라고 표현을 안했다.

이제 순수한 우리말인 춤을 붙여 궁중춤, 민속춤, 나비춤, 무당춤, 살풀이춤, 입춤, 장고춤, 바라춤, 칼춤(승무), 탈춤 등이라고 해야 한다. 춤은 한자어인 舞踊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훌륭한 우리말이다.

舞踊은 한자어다. 한자어이다보니 춤은 舞踊, 굿은 巫俗, 탈춤은 假面劇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1909.5.20.)에 보면, 당시 演劇이니 演技란 용어는 없었다. 그 옛날 사냥으로 배불리 먹다 보니 어깨춤이 절로 나오고, 즐거울 때는 뇌가 즐거워 흥겨운 춤이 나왔다.

사냥할 때 들었던 칼을 들고 추면, 절로 액을 막는다는 느낌이 오고, 한편 승복을 입고 추면 고뇌에 찬 스님을 연상케 된다. 이처럼 형편에 맞게 흥을 돋구어 춤을 추면, 칼춤과 승무의 상징적인 행위 예술춤이 된다.

음악에 맞춰 정확하게 움직이고 춤추듯 하는 체조를 "무용체조"라고 하지 않는다. 팬터마임댄스는 영어로 표현하였지만 무용이 될 수 없듯이, 우리말로 표현 한다면 "몸짓춤"이면 족하다. 몸짓춤은 앞서 표현했듯이 리듬이나 박자, 멜로디, 음악이 없을 때도, 흥에 겨워 움직이는 행위예술이다.

예로

1) 무천(舞天)은 10월이면 하늘에 제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과 노래와 춤을 추며 하는 행사이었다.

2) 구약성서(시:150)에 나팔 불고 비파, 수금, 소고치고 현악과 퉁소와 제금으로 찬양하며 노래와 춤을 추라고 했다.

3) 독일어인 danson은 “잡아 늘리다. 잡아당기듯이” 뜻을 가지고 있다.

4) 미국의 철학자 SK링거는 무용동작은 재미있는 동작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한다고 해서 활기찬 몸짓이 무용이 될 수 없듯이 음악에 맞춘 동작이나 리듬이 있는 동작만 무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음악적 리듬이든 물리적 운동만으로는 무용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위의 예를 들었듯이 우리는 옛부터 춤을 추었다. 우리가 춤을 출 때는 잡아 늘리고 당기듯이 자연스럽게 꾸밈없이 휘저어야 한다. 악기도 칠 때 “말아서 치라”고 요구하듯, 우리 춤도 말아서 잡아당기듯 추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옛부터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는(work and play) 흥취있는 민족이다. 우리춤은 손가락 하나부터 몸 전체로 흥겹게 움직이는 몸짓춤이다. 그래서 대삼, 소삼, 들숨과 날숨이 자연스럽게 감돌아들고 풀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몸짓도 뇌에서 거부하면 안된다. 앞에서 말한 감각기관을 향한 다차원적 현상은 뇌의 통제에 의해 이뤄진다. 뇌(腦)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손발이 자기 위치를 찾아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그 균형이 뜻하는 상징은 곧 현실의 창조성과 연계된다.
 
그동안 한국춤은 자연의 춤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춤은 어울림의 공동체이며 안녕을 기원하는 춤이기에 자연적인 춤이지 인위적(人爲的)인 춤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춤을 가르칠 때, 무용하듯 하라고 하면 잘 못된 표현이다. 과장되고 꾸미는 행위는 춤이 아니다.

그럼에도 몸짓춤은 연출이나 안무가에 의해 끊임없이 다양한 꾸밈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의도하는 형식에 맞춰 상대방과 조화되는 역할이 있기에, 對舞의 경우 거기에 맞는 그림이 나와야 한다. 춤은 뇌(腦)의 작용에 의해 동작선이 서로를 자기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를 꾸미려면 각자 표출이 다르더라도 서로 조화의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

내가 왜 이런 동작을 해야지? 순간 너무 지나친 꾸밈으로 자기자신이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안 된다. 자연적인 즐거움과 슬픔으로 뇌와 몸이 하나가 될 때 소통이 되고 진정한 몸짓춤이 된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유행되는 관절춤은 말하자면 죽은자(死者)의 춤이다. 죽은 사람의 뼈를 다시 살려 내 움직이게 하는 관절춤을 흉내 낸 것이 바로 인형춤이요, 로봇춤이다. 이것이 재미있다 보니 최근에는 유명 스타도 로봇춤에 탐닉되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춤은 이처럼 새로운 것을 모방하여 새로운 무늬를 만든다. 이를 바탕으로 춤이 미학적·창조적 형태로 진전하게 되고, 창조자는 이에 맞춰 자꾸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빠르게 변하는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온갖 꾸밈으로 시대의 변화에 맞게 구상을 하다 보니, 춤은 우리 생활문화의 소통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개인 춤은 물론 배역의 캐릭터에 맞게 흐름의 창작을 자기답게 소화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몸짓은 선조들에 의해 무(無)에서 유(有)로 이미 창조되었고, 또 안무로 표출되었기에 앞으로도 더욱 원형의 독창적인 춤사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전언한 바와 같이 우리춤의 根本은 밀고, 받고, 감고, 들숨과 날 숨으로 풀고(감돌아 들고 풀돌아 든다), 같은 손, 같은 발과 첫 박이 강박이면서 장단과 장단사이에 존재하는 추임새가 일품이다. 이것이 한국춤의 특징이다.

여기엔 靈的 精的, 肉的, 삼위일체가 되어 흥과 멋과 맛을 곁들인 얼씨구! 좋다! 잘한다! 같은 추임새가 나와야 내부 지구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춤의 연결 속에 이미 정, 중, 동의 흐름이 조화(調和/造化)되었으니, 이것을 달리 跳舞, 健舞, 軟舞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활발하고, 묵직하고, 끈적끈적하게 춤을 추라는 의미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한국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한국 춤보다는 서양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 서양 것 속에 우리 것을 끼워주는 형태가 되었다. 한국춤을 전공하면 살아가기가 어렵다. 적어도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전통연희 종사자(전수, 이수자 포함)들만이라도 결혼해서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학교(초중고대학) 교육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전공필수과목>으로 선정되어야 한다. 그동안 입시교육 위주로 인성교육이 무너졌고, 자기의 전공을 키워주기 위해서 설립한 자사고나 외고는 반대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학교로 둔갑했다.

이제 보다 새로운 입시제도가 절실하다.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저마다 대학을 가다보니 우리사회는 대학생 천국이 되었다.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저마다 낮은 직업은 그들 눈에 차지 않는다. 그동안 학벌 차별을 없애야 하느니 어쩌니 하며 새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통령이 강조하지만 언제나 그 지시는 메아리일 뿐이다.

과연 전통과 관련된 교육과 문화예산에 대해 이제 새로운 정부의 정책입안자가 다양한 수단인 사회교육, 문화, 융합정책 및 진흥법을 어떻게 입안할 것인지 궁금하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문화를 "19번"이나 강조했고 "문화융성위원회"도 출범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장, 차관회의에서 “모든 정책은 국민관점에서 추진되어야 하며 복지부동 등 부정적 수식어가 더 이상 따라붙지 않도록 공무원이 혁신의 주체가 되어 과감하게 정부혁신을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행안부 심보균 차관은 “공무원의 일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정부혁신 시작“이라며 “100만 공무원의 1분1초가 국민을 위해 바뀌는 그런 업무혁신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제 탁상행정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혁신지침“ 협업과 현장소통을 통해 현장중심 정책대안을 마련, 국민이 체감할 수 있도록 원하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겠다는 공무원과 국민이 함께 운영방식인 해커톤(hackathon)을 내놓았다. 즉은 주민의 고충을 듣고 대처하여 현실로 구현하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는 혁신이 1회성이 아닌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후에 사구타파(四舊打破: 낡은 사상, 문화. 풍습, 습관) 운동으로 중국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파괴가 되어 이제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촉진제가 되어 서양문화를 경계하자고 하고 있다.

우리도 지금까지 서양문화 속에 한국 것들을 끼어주는 형태가 되어 있어, 이번 정부에서는 위와 같이 현장중심으로 변화해보려고 따끔하게 나왔다. 그러나 정권마다 현장중심을 외쳤다. 그래도 지금 다양한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하니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다시한번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또 제기 될 우리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에 대한 관심을 새 정부의 전문가들이 보다 알뜰히 살펴, 문화정책 수립과 자문을 통한 집행 과정에서 문화융성을 기대해 본다.

이제부터라도 정책입안자들은 관념적,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접근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희망(希望)은 정부에서도 혁신적인 현장교육시스템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하루속히 현실로 실현(實現/實踐)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