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문묘일무에 깃든 유가의 예악정신
[성기숙의 문화읽기]문묘일무에 깃든 유가의 예악정신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4.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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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열(列)을 지어 움직이는 예순 네 명의 몸짓이 고요하면서도 한결같다. 장엄함을 빚어내는 문묘제례악의 선율은 아정한 몸짓을 추동한다. 공경과 겸양의 마음가짐으로 질서와 조화를 품은 문묘일무가 웅혼한 기운을 담아 경건하게 펼쳐진다. 성균관 대성전 앞뜰을 붉게 수놓은 질서정연한 무원들이 관람객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지난 3월 26일, 한국 유교의 성지 성균관 대성전에서 열린 춘계 석전대제(釋奠大祭) 중 문묘일무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장엄함과 아정미가 공존했다. 무원들이 빚어내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움직임의 형상에서 유가의 예악정신을 엿본다. 이러한 심미성의 근저에는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있는 성균관의 존재도 한 몫을 했으리라.

현존하는 성균관은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를 비롯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메인에 해당된다. 유학을 교육했던 명륜당, 도서관인 존경각,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서재 등도 유서 깊은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성균관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석전대제가 봉행된다. 공자를 비롯 유가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는 동양문화의 원류로 자리매김된지 오래다.

석전대제는 다른 말로 문묘제례(文廟祭禮)라고도 불린다. 문묘제례에 쓰여지는 음악과 춤을 일컬어 문묘제례악 또는 문묘일무라고 칭한다. 문묘일무의 기원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로 소급된다. 당시 일무는 주대의 예법을 따랐다. 주대에는 봉건사회의 계층 간 차별을 유지시켜주는 등급관념이 핵심적 가치로 중시됐다. 사회 모든 분야에 유가의 등급관념이 적용됐고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규범으로 여겨졌다.

문묘일무에 내재된 사상적 키워드는 조화와 질서에 있다. 중국 고대 예악사상의 교과서로 불리는 『禮記』 「樂記」에는 “樂은 天地의 調和이고, 禮는 天地의 秩序이다”, ”라는 글귀가 전한다. 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해 예와 악으로서 조화와 질서를 꾀한 것이다. 일무의 형식과 문법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일무(佾舞)’에서의 ‘일(佾)’은 나열한다는 뜻으로 열(列)을 의미한다. 일무의 형식에 깃들어 있는 열은 ‘행렬(行列)’을 말한다. 일무의 행렬은 무원의 편제로 형식화된다. 무원의 편제로 형식화된 행렬은 향수자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등급이 다르게 매겨졌다.

예컨대, 64명으로 구성된 팔일무(八佾舞)는 천자(天子), 즉 황제 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36명이 등장하는 육일무(六佾舞)는 제후들이, 그리고 16명이 춤추는 사일무(四佾舞)는 대부들이 감상할 수 있었다. 최하위 등급인 이일무(二佾舞)는 2명이 춤추는 형식으로 사(士)들의 몫이었다. 이처럼 일무의 형식에는 조화와 질서를 꾀하여 유가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예악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일무에 표상된 주대의 엄격한 등급관념은 춘추시대에 이르러 무너졌다. 『漢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주(周)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예법이 무너졌고 심지어 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팔일무가 대부의 뜰에서도 거행되었다”.  『論語』 「八佾」 편에는, 팔일무를 춘 대부 계씨(季氏)를 공자가 꾸짖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주대의 예악제도에 따르면 대부인 계씨에게는 사일무만이 허용됐다. 그런데 오직 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팔일무가 대부의 뜰에서도 추어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무형식에 적용된 주대의 등급관념이 점차 쇠락해 갔음을 말해준다. 그만큼 사회가 혼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가사상은 한나라 때 국가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중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지켰다. 유가의 아이콘 공자는 전통시대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 그 위상이 뚜렷했다. 그러나 유교의 발상지 중국에서 공자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음은 아이러니컬하다. 공자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무렵이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침입 등 외세의 도전이 거세지자 후스(胡適) 등 신문화운동 주창자들은 외풍에 굴복당한 원인제공자로 수천 년 전의 공자를 끌어와 ‘공자타도’를 외쳤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고에서 공자 또한 자유롭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반대로 공자를 옹호하려는 흐름도 만만치 않았다. 개혁파 캉유웨이(康有爲)가 선봉에 섰다. 『大同書』의 ‘대동(大同)’이란 표현에서 엿보이듯, 캉유웨이는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한 상징적 원점으로 공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황제의 권력을 통제하겠다는 발상도 실패로 끝났다. 공자를 신격화하여 ‘유교의 종교화’를 시도했으나 하늘의 뜻은 달랐다. 그후 유가를 신봉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향하자 공자의 추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49년 공산당의 집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공자의 효용적 가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공자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역사의 치욕으로 평가되는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공자는 또 한 차례 유린당한다. 공자는 봉건잔재의 상징으로 매도되었고 공자사상은 인민의 영혼을 좀먹는 부질없는 것으로 폄훼되기에 이른다. 홍위병들이 휘두른 광란의 춤으로 중국 전역에 산재한 공자유적들이 부서지고 파괴됐다. 봉건타파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공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차츰 사라져갔다.

사회주의체제의 중국에서 공자가 복권되기란 요원한 것처럼 비춰졌다. 그러나 역사의 반전은 금새 찾아왔다. 90년대 개혁개방과 더불어 중국에도 차츰 자본주의 물결이 스며들었다. 사회주의체제의 보완제로 공자의 유학사상이 체제이데올로기로 부상되기에 이르렀다. 시진핑 체제의 현대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증오했고 그러자 공자가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공자의 존재론적 가치 창출을 위한 중국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우선, 세계 각국에 포진된 공자아카데미에서 쉽게 확인된다. 또 문화대혁명으로 폐허가 된 중국 각지의 공자유적들이 속속 복원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잠자고 있는 공자를 일깨워 중화패권주의를 실현하려는 야망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변덕스러웠던 중국과 달리 한국은 장구한 세월 공자를 존숭해왔다. 문묘제례의 존속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치적 격변에 따라 문묘제례가 단절되기도 했던 중국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중국은 소실된 문묘일무를 한국에서 배워갈 정도로 예악문화의 전통이 망가졌었다. 공자의 나라, 유가의 종주국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우리 역시 문화적 우월감에 도취해 있을 수만도 없는 형국이다. 문묘일무의 원형논란이 수년째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쟁점은 이른바 ‘삼방배(三方拜)’이다. 일무 춤사위에서 3진3퇴의 재현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고 훼손한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문묘일무에도 덧씌워져 있는 셈이다.

공자복권을 통해 유가의 효용적 가치를 재발견한 중국은 전국 각지의 공자묘에서 매년 문묘일무를 거행하고 있다. 단절됐던 문묘일무를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선전하는 중국의 행보가 무서울 정도이다. 그런데 ‘지금·여기’, 우리는 어떠한가?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문묘일무의 원형을 어떻게 보존 계승할 것인가? 민(民)·관(官)·학(學) 그리고 유림(儒林)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할 때이다. 문묘일무가 동양 정신문화의 보고(寶庫)이기에...

성기숙(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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