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春風’ 속의 중고제, 심수봉 음악의 기원
[성기숙의 문화읽기]‘春風’ 속의 중고제, 심수봉 음악의 기원
  • 성기숙 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4.1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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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평양으로 향했던 ‘봄이 온다’가 ‘가을이 왔다’를 잉태해 돌아왔다. 다행스럽고 반가운 귀환이다. 지난 두 달,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흥분과 기대의 노정에 서있었다. 예기치 않은 세찬 춘풍(春風)에 국민 모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지난 3월, 4월 남북한에서 총 네 차례에 걸쳐 대중음악으로 구성된 예술단공연이 개최됐다. 평창올림픽 때 북측의 삼지연관현악단이 방남하여 강릉과 서울에서 두 차례 공연을 가졌다. 지난주엔 남측 방북예술단이 평양에 입성하여 두 차례 공연을 치렀다. 분단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친 남북 예술단의 교차공연에서 상호 화해와 신뢰의 구축 가능성을 심어준 것은 값진 성과다.

이번 남북한 예술단의 교차공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가수를 꼽으라면 아마도 심수봉이 아닐까 싶다. 물론 심수봉은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고 무대에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째서 그러한가?

지난 강릉과 서울공연 때 삼지연관현악단 소속 북한 가수는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열창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번 남측의 평양방문공연에서는 윤도현이 이 노래를 록버전으로 편곡해서 불렀다. 다소 경직됐던 평양관객은 이 노래가 나오자 뜨겁게 호응했다. 환송 만찬장에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자 북한 문화계의 최고 실력자 현송월이 이 노래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고 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이 노래에 관심을 보탰다. 윤도현이 록버전으로 바꿔 부르자 어떻게 편곡한 것인가를 물으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전한다. “남자는 다 그래”라는 마지막 구절이 불려질 때 북한의 최고 여성 실세 리설주와 김여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는 소식도 화젯거리다. 노래의 원곡자는 빠졌지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이렇듯 분단의 경계를 넘어 남북한에서 이른바 ‘주연급’ 대접을 받은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수 심수봉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학가요제 출신 심수봉은 제1세대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또 국민가수, 트로트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특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세대, 성별, 지역을 초월하여 시대를 관통하는 최고의 노래로 평가된다. 심수봉의 노래가 남북한에서 이토록 극진히 사랑받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타고난 재능에서 비롯된 실력이다. 독특한 비음의 소유자 심수봉의 노래는 애수어린 음색으로 듣는 이의 감성을 흠뻑 적신다. 애절하게 휘감아 넘기는 소리는 범접할 수 없는 특장으로 손꼽힌다. 그의 소리에 내장된 한(恨)과 은거(隱居)에서 비롯된 특유의 신비감은 잦은 정치적 탄압과 굴곡진 인생의 풍파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심수봉은 트로트계(界)에서는 드물게 작사, 작곡이 가능한 실력파 가수다. 또 피아노는 물론이요 기타,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해 리듬감각도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렇듯 심수봉의 남다른 재능은 집안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수봉은 충남 서산의 청송 심씨 가문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은 한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5대(五代)에 걸쳐 기라성 같은 전통예인을 배출한 최고의 국악명문가로 회자된다. 심수봉의 할아버지 심정순을 정점으로 심상건·심재덕·심매향·심화영 등 당대 최고의 국악명인들이 포진돼 있다.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은 심정순은 20세기 초반 서구식극장인 장안사 소속 예인으로 활동했다. 이른바 ‘심정순일행’을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음반취입과 신문연재, 방송출연 등 전방위적 활동을 펼치면서 선구자적 면모를 과시했다.

심정순의 장남이자 심수봉의 부친인 심재덕의 활동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국악인으로 이화여대에서 국악이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심재덕은 여동생 심화영과 함께 청진권번, 진남포권번 등에서 활동했다. 가무악 전반에 능통했던 심화영은 이화학당을 다닌 인텔리였다. 북쪽에서 활동할 즈음 충남 홍성 출신의 명고수(名鼓手)·명무(名舞) 한성준과 함께 활동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국악명문가로서의 심정순 집안 예인들의 활약은 실로 눈부시다. 심정순의 장녀 심매향은 조선권번 소속으로 공연활동과 음반취입, 방송활동 등을 병행한 전형적인 예기(藝妓)였다. 용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소리와 연주, 춤 등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대중스타이자 엔터테이너였다. 그러나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아깝게도 심매향은 스무 살에 요절한 비운의 스타였다.

그밖에 심정순가(家)에서 꼭 기억해야 할 예인이 있다. 바로 심상건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는 숙부인 심정순 밑에서 자랐다. 숙부의 기예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심상건은 일찍이  서울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가야금병창, 산조, 기악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웅숭깊고 호방한 그의 음악세계에 매료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감자’의 작가 김동리도 그의 팬이었다고 전한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가 그의 제자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상건은 해학과 파격의 예인으로 불리운다. 또 가야금 즉흥연주의 달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0년대 후반 신무용가 조택원의 춤반주자로 미국에 진출했음도 이채롭다. 조택원은 심상건의 장고가락에 영감을 얻어 ‘신노심불로’라는 작품을 창작해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하는 등 근대공연예술사에 유의미한 업적을 남겼다.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중고제 국악명문 심정순가 사람들은 탁월한 실력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특히,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강점이라는 격동의 시기 조선의 춤과 음악을 보전 계승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점은 실로 존경스럽다. 민족 고유의 전통가무악을 지켜낸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였다.

중고제의 명가 청송 심씨 가문의 끝자락에 이애리가 있다. 이애리는 심화영의 외손녀로 중고제 승무(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의 맥을 잇고 있는 중견 전통춤꾼이다. 그가 잇고 있는 중고제 승무는 단아하고 정갈하며 절제미가 돋보이는 고형(古型)으로 문화유산적 가치가 크다. 그런데 혈통으로 이어지는 심정순가 중고제 소리의 예맥은 단절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팔록-심정순-심재덕-심수봉 등으로 맥이 이어지나 심수봉이 순수 국악의 중고제 소리를 비껴나 대중가수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충청도와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중고제 소리는 단조롭고 밋밋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고제 소리에 대한 유영대 교수의 분석은 매우 심층적이다. “중고제의 창법은 낮은 음성에서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음성을 낮추어 부르는 것으로서,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불러야 제격인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다. 심수봉의 노래 저변에 깔린 독특한 음색의 기원은 중고제 창법의 독창적 선율에 기인된 것은 아닐까. 중고제 소리 특유의 감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뼈 속 깊이 스며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연스런 귀결이요 숙명인 것이다.

몇년 전, 중고제 춤·소리문화를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심정순가의 고향인 서산에서 개최한 바 있다. 당시 가수 심수봉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서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귀소본능이랄까, 뿌리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다. 중고제 소리를 자양분으로 새로운 음악세계를 펼쳐보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천재성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일궈낼지 기대해봄직하다. 가수 심수봉 버전으로 재창조된 중고제 소리가 미래 귀중한 자산이 되길 바라본다. 또 북녘 땅은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 널리 확산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