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문학의 순기능 (3)
윤동주와 문학의 순기능 (3)
  • 김우종(전 덕성여대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09.09.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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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여기서 그가 말한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와 고통을 혼자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십자가를 허락했듯이 윤동주도 자신이 그런 역할을 대신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바란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동족의 배반자들과 로마 군사들이 몰려 오기 직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담 흘리고 기도하며 그가 믿는 하나님에게 그 ‘쓴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듯이 망설이고 번민하는 시들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것은 물론 그의 종교적 기원의 형태지만 더 나가서 우리 민족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바치겠다는 선언이며 또 더 나가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휴머니즘의 선언이었다.

다만 ‘허락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것은 자기 한 몸의 희생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허락해 달라는 겸허한 태도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해 태평양전쟁 직후에 연희전문을 조기 졸업하고 이듬해 봄에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을 거쳐 10월에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다니게 된 그는 다음해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 때 고향가는 짐을 싸 놓고 시모가모가와(下鴨川) 경찰서에 구금되고, 다음 해 2월에 교토재판소에서 2년 징역형을 받고,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윤동주의 당숙인 윤영춘 교수가 송몽규를 면회하고 그로부터 들었다는 증언에 의하면 이것은 생체실험에 의한 죽음이며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으로 나타나 있다.

같은 독립운동의 주동자로서 투옥되어 같은 생체실험을 받고 있던 교토제국대학 학생 송몽규는 다음달 3월 10일에 윤동주의 뒤를 따랐다.

이같은 윤동주의 문학은 민족해방과 함께 그 한계를 뛰어 넘어서 온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휴먼 메신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이런 민족 구원의 기능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한 평론가는 대표적으로 거론 되는 친일 시인 서정주의 역할을 대학 강단에서 이렇게 반문하며 옹호한 일이 있다. 그런 친일 문학이 과연 그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수 있었겠느냐고. 즉 그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서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라고 선동했더라도 그 말 듣고 나가 죽을 조선 사람들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삼천만 동포를 개죽음의 전쟁 속에 몰아 넣으려 했어도 이에 응한 사람이 없다면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논리다. 물론 응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러리라는 가정이고 추측이지만.

그런데 이런 주장이 옳다면 친일과 반대로 민족적 저항시인으로 평가되어 온 윤동주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 시기에 그 문학이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겠느냐고 반문하며 그의 역할을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윤동주의 문학이 누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문학이라면 그 당시의 윤동주 문학은 쓸모없는 휴지조각 묶음에 불과하며 그 죽음은 개죽음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문학 또는 그 작자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문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 문학 작품은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 그 결과에 의하여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문학은 그것이 쓰이거나 발표된 지역적 공간 속에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명인의 범작이라도 혼자만의 밀폐된 사적 공간에서 그친 것이 아닌 이상 사회적 활동으로서 얼마든지 널리 확산되며 그것은 세계적으로 읽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문인은 공인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영향까지도 미치게 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문학은 화장실의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당시의 다급한 상황에서만 사용되고 버려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의 배경이 낳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시적(限時的) 일회적인 용도가 아니라 긴 세월의 역사적 기능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