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악과에 다니는 4명의 복학생이 전통음악 연주회에서 창작곡을 선보였다. 그 곡의 이름은 <공명>. 그 이름은 이 팀의 이름이 됐고 이들이 만든 악기의 이름이 됐다. 그리고 그 이름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 ‘젊은 국악’의 멋을 전한 전도사의 이름으로, 젊은 국악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박승원, 송경근, 강선일, 임용주 이 4명으로 이루어진 공명은 그동안 국내외 각종 공연과 페스티벌, 쇼케이스 참여와 더불어 영화와 드라마 OST 제작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악의 멋을 전했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공명에게 본지는 젊은 국악의 길을 계속 가라는 격려의 마음을 담아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 예술가상을 수여했다.
20년 전과 같이, 함께 어울리는 국악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쉼없이 길을 가는 공명이 전하는 ‘한 목소리’를 여기에 전한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우리가 젊은 예술가라니? 늙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그런데 시상식장에 가니 정말 쟁쟁하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그 때 생각했다. ‘우린 젊은 게 아니라 아직 어리구나’(웃음).
올해로 공명이 활동한 지 21년이 됐다. 어떻게 결성이 됐나?
같은 대학 국악과 동문이었는데 군대 다녀와서 복학했을 무렵 학교에서 전통음악 연주회가 있었다. 정기적으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라가보라고 추천을 받았는데 그 때 만든 타악곡 제목이 <공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팀 이름이 됐다.
공명에는 여러 뜻이 있다. 타악팀이라 칠 공(攻), 울릴 명(鳴) ‘쳐서 울린다’는 뜻이 있고 함께 공(共), 울릴 명(鳴) ‘함께 울린다’는 뜻도 있고 함께 공(共), 밝을 명(明) ‘함께 밝힌다’는 뜻도 있다.
타악이라는 것이 치면서 소리의 진동이 퍼지지 않나. 진동하면서 공감이 생기는 것이고. 관객과 에너지를 일으키는 것이 ‘공명’이라고 봤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창작타악그룹 공명’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됐다.
우리가 직접 만든 타악기가 있는데 크기가 서로 다른 대나무의 진동과 울림을 이용하여 만든 대나무 악기다. 이 악기의 이름을 놓고 여러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우리 이름으로 짓자고 해서 이 악기 이름이 ‘공명’이 됐다. 만든 팀의 이름이기도 하고 대나무통의 울림도 ‘공명’이기에 그렇다.
1997년에 처음 등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국악 그룹으로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게 보이지 않았던 때였을텐데
이전에도 국악 창작그룹으로 활동한 선배님들이 계셨다. 그분들의 활동을 본 것이 동기 부여가 됐다. 그 때가 한창 젊은 국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중성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시작인 단계였다. 국악관현악이나 조직에서 하기 어려운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창작음악을 만들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직접 가 놀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시작했고 홍대 거리문화축제 등을 다니면서 소통의 장을 조금씩 넓혀나갔다.
시작했을 때 거창한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았다. 대단한 포부보다는 음악 만드는 것이 좋고 우리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그 자체가 좋았다. 선배들의 정형화된 형태에서 조금 벗어나 젊은 국악을 해보자. 우리 방식대로 해보자 그 마음으로 한 것이다.
국악은 아름답지만 다양한 장르를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공명의 곡을 들으면 국악도 다양한 장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결합할 수 있었던 과정이 있다면?
다른 장르와 협업하며 그 과정이 생긴 것 같다. 창작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전통음악을 전공하는 이들은 여러 한계가 있었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연극, 영화, 뮤지컬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협업하는 기회가 있었다.
특히 연극의 경우는 한복 입고 얌전하게 연주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무조건 움직여야하고 무대 의상도 입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고 춤도 춰야 하기에 어려웠다. 그렇게 협업을 하니 우리가 남들이 안 하는 행동을 하고 있고 이게 무대에 고스란히 적용되니 조금 더 자연스럽게 시작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이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에 공연된 <레이디 맥베스>였을 것이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공연이었는데 우리가 악사로 나오면서 맥베스와 왕의 심리적인 형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광대 역할을 했다. 연기도 하고 춤도 추고, 지금 하라고 해도 낯뜨거워서 못할 것들을 많이 했다(웃음).
정말 의미가 있었다. 공연하기 전 연기자들과 몸을 푸는 데 어떻게 보면 창피하기도 하잖나. 하지만 배우들의 모습을 3개월 이상 매일 보면서 한 공연을 위해 땀을 흘리는 그들의 노력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저렇게까지 연습을 안 하는데(웃음). 공명이 퍼포먼스를 할 수 있도록 해줬고 재미있는 워크샵으로 인식됐다. 물론 연기 못한다고 연출가님께 혼나기도 했지만 말이다(웃음).
정말 결과가 좋았던 것은 이 연극으로 인해 팬들이 생겼고 결국 예술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국악당이 아닌 예술의전당에서 기획하고 공연한 것이 정말 기뻤고 우리에게 정말 좋은 제안이고 기회였다.
그로 인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고 시드니 페스티벌에 참여할 수 있게 됐고 해외 뮤지션들도 많이 만나게 됐다. <레이디 맥베스>가 지금의 공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연 15주년 콘서트가 생각난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주면서 장장 6시간을 공연했다. ‘판소리 완창 공연이냐’라는 소리도 듣고 그 공연이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관객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20주년 콘서트는 10시간 해야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는데(웃음), 그렇게는 하지 말자고 했다. 그 때는 젊었지만 지금은 체력이 약해졌잖나(웃음).
해외 공연은 2008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WOMEX(워맥스) 쇼케이스’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페스티벌이나 쇼케이스에 초청받아 간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 우리는 ‘워맥스’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월드뮤직 엑스포’라고 한다. 전세계 공연 디렉터들이 다 모이는 일종의 마켓이다.
그 곳의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자 디렉터들에게 선택이 됐고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을 다니며 해외 공연의 발판을 마련한 공연이라 의미가 깊다.
또 페스티벌의 성격상 한 번 초청한 팀을 다시 초청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후부터 한국팀에 대한 관심이 생겨 우리와 함께 후배들도 많이 초청되고 다녔다. 한국 팀이 더 많이 가게 된 것을 보니 정말 우리가 열심히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전쟁과 평화’라는 곡을 인상깊게 들은 바 있다. 국악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음악이었을텐데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우리 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양민 학살에 가담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사죄를 드리는 행사가 있었다.
그 앨범의 프롤로그를 우리가 맡아 헌정한 곡이 ‘전쟁과 평화’ 였는데 당시 공연을 준비할 때 해병전우회가 공연 주관사에 항의하며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을 하고 공연 당일 경계를 강화했다고 알고 있다.
곡들을 들어보면 어떤 곡들은 ‘국악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변화의 키포인트가 있다면?
어떤 깊은 고민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정형화를 어떻게 탈피할까를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팝송, 가요를 듣고 전통에 익숙한 세대가 아닌지라 서양음악이 몸에 밴 상황에서 전통음악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말기로 했다. 만약 만들면서 ‘선생님들이 이 곡을 좋아할까 싫어할까’를 고민했다면 못 만들었을 것이다. 서양에 전통리듬을 섞고 디스코 리듬이 돌발적으로 나오는 것 등을 관객들이 좋아한다면 표현하자고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격’의 문제로 인해 못했던 것도 있었다.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콜라보 공연도 하고 알록달록 머리로, 홍대 패션으로 공연하고 했는데 정형화를 추구하는 분들 중에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충고를 해주시기도 했다. 지금도 물론 그런 분들이 계시고 더 깊은 고민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맞는 말씀이시다.
우리는 그 당시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이고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후배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이 표현하려는 것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정형화된 부분도 현대적으로 접목하고 오리지널만으로도 세련되게 표현하는 모습을 봤다. 정말 좋게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걸어온 길이기에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복잡하고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는 길을 가면 된다.
지난 4월 28일 진천에서 <자연으로 통하는 비상구_공명 콘서트 ‘고원(Plateau)’>을 열었다
‘방방곡곡’이라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추진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각지 문화예술회관에서 신청을 하면 지원을 해주며 공연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지난해 쇼케이스에서 우리가 <고원>으로 평가 1위를 해서 바로 선정이 됐다.
지방 곳곳을 보면 국악 팀의 신청 비율이 낮고 그래서 공연 예술단체나 개인들이 방방곡곡에서 많은 상처를 받는다. 연극이나 발레, 오케스트라 같은 것은 신청이 많이 오는데 국악은 사람들이 많이 안 본다는 생각 때문에 신청부터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천을 비롯해 앞으로 공연을 하게 될 지역에서 국악 공연 선정에 관심을 더 많이 가져줘서 우리와 후배들이 더 많은 전통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년을 넘게 한 팀을 이루고 있는 비결이 있다면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전에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지금은 잘 못 다니고 공연 외에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내부적으로 서서히 진행하는 작업이 있다. 그 작업은 시간을 두고 진행하는 과정이고 완성되거나 한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발맞춤을 하고 있다.
분쟁이라는 게 그렇다. 사실 분쟁이 일어날 이유는 별로 없다. 시간이 지나면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초창기때는 싸웠다가 풀었다가 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만 봐도 상태를 알 수 있게 됐다. 차츰 서로를 알아가면서 알아서 거리를 조절하게 된다. 각자 음악적인 성격이 있지만 한 팀이기에 제시하는 사람의 의견을 받아 연습하고 있다.
서로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니까 말을 잘 안한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그런 평화, 그 평화가 원동력이 아닐까?(웃음)
공명의 뒤를 이은 후배들이 나오고 있다
별로 지적할 것은 없고, 정말 잘한다. 지금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막 꺼내는 과정이다. 너무 젊고 어리기에 힘들면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을텐데 선배들이 도와주고 하면 정말 지금의 젊은 친구들이 꽉 잡을 것 같다(웃음).
국악이 지금 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이만큼 가지를 많이 뻗친 적이 없다. 사실 K-POP이 세계를 휩쓰는 것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가지를 뻗치고 있기에 한국의 다양한 음악이 나오고 세계에서 인정받을 것이라 믿는다.
20년 후의 공명은 어떤 모습일까?
음반 3~4개 정도 내고 10곡 정도 만들고 지금처럼 계속 활동하고 있을 것 같다. 오래 있는 것이 아닌 정말 흐뭇한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진심이 발동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곳이라 믿는다.
대단한 팀, 거대한 팀이 아니라 처음 있던 마음, 창작 의욕 등이 정말 끝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어떻게 저 마음을 계속 간직하지?’ 그 말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