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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윤재걸 시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나를 기자로 ‘통일주의자’로 이끌었다”
구술로 전하는 ‘5.18 취재기’와 시련, 그리고 ‘유토피아’를 향한 꿈
2018년 05월 09일 (수) 10:02:16 임동현 기자 press@sctoday.co.kr

윤재걸. 그의 이름은 문학계에서도 언론계에서도 빛나고 있는 이름이다. 시인을 꿈꿨지만 긴 글을 쓰고 싶어 언론사 기자로 활동한 그에게 이 한 마디가 들려온다. “광주에 난리가 나부렀다!”

기자로서 윤재걸에게 기념비가 될 사건이자 일생의 전기가 되는 두가지 ‘특종’이 있다.  ‘5.18 광주의 봄‘과 ‘서경원 방북’ 사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특종은 언론인으로서, 인간 윤재걸에 있어서 일생일대의 시련을 안겨준다. ‘잘 나가던’ 일간지 기자의 사명을 접어야 했고, 평생을 허리통증을 달고 살아야 하는 고통의 질곡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도 그 그늘은 걷혀지지 않았다. 

홀몸으로 광주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 뛰어든 윤재걸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군인이 시민에게 총을 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만이 비춰졌다. 그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도 공개될 수 없었다. 해직으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야했다. 세월이 지나 그의 취재로 얻어낸 ‘헬기 기총소사’가 특종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보안사의 고문이었고 결국 그는 척추를 두 차례나 수술해야했다.

민주화,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글을 쓰고 시를 써왔던 윤재걸. ‘볼펜 잡역부’라고 부를 정도로 글에 집중한 그는 ‘한겨레신문’을 통해 민주화의 염원을 이루려했으며 본지 주필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으로 유배의 땅이었던 해남 강진을 ‘유토피아’로 이끌려는 그가 눈부시도록 참혹했던 5월 ‘꽃잎’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시를 읽어주고 있는 윤재걸 시인

내가 전부터 시인을 꿈꾸기는 했지만 시로는 양이 차지 않았어. 내가 고산 윤선도 선생의 11대손인데 고산 할아버님 이후에 시인이 된 사람이 없었고, 또 나도 글쓰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게 없으니까(웃음). 그래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를 썼지만 긴 글을 쓰고 싶었어. 언론계에 발을 들인 것도 그 영향이었지.

74년, 75년에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는데 그때는 ‘프레스카드’라는 것이 있었어. 박정희 정권이 사이비 기자 없애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게 있어야만 취재가 가능했거든. 이게 기자들을 억압한 채찍이었던 거야. 대신 정부 지원, 월급 인상이라는 당근도 줬지. 

그때는 기사가 실명제가 아니었어. 어느 기자가 썼는지가 안 나와 있는거야. 남들은 누가 쓴 기사인지 모르고 쓴 사람만 글을 보고 ‘이건 내가 쓴 거구나’라고 아는 정도였지(웃음).

긴 원고를 쓰고 싶어서 신동아를 지원했는데 프레스카드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 내가 카드가 있으니까 탐사보도 같은 어려운 취재는 나에게 맡겼지.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글을 많이 쓰게 된거야. 원없이 썼지. 원고지 100~200매 정도 썼으니까.

그러다 80년 5월이 온 거야. 광주에서 가족 친지들이 전화가 왔어. “광주에 난리가 나부렀다!”

“광주에 난리가 나부렀다!”

‘전두환이가 시민을 몰살하려한다’. ‘아무한테나 총을 쏜다’ 이런 내용들이 나한테 온거야. 또 마침 신동아에서 내가 광주 출생이니까 나보고 가라고 했어. 그래서 5월 21일에 광주로 갔는데 그 전날 발포가 시작된 상태였어. 

공수부대가 바리케이드를 쳐서 광주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지. 나주 쪽에 있다가 광주로 가려니 이미 바리케이드가 쳐졌어. 그 때 봉고차가 서너대 지나가는데 차가 다 피투성이인거야. 결국 기자증을 구두창 밑에 숨기고 간신히 광주에 갈 수 있었어. 그때는 군인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기자를 싫어했을 때니까.

그렇게 광주에 어렵게 왔는데 취재를 할 수가 없었어. 완전 전쟁터야. 3박 4일을 있었는데 기자 한 사람이 그 상황을 어떻게 다 커버하겠나.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쏘는 것도 목격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취재 보고를 했지만 취재 검열이 있어서 실을 수가 없었어. 제작거부에 맞서야했지.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고 믿고 있기에. 그때 내 나이가 34세였으니 한창 혈기가 넘칠 때였지. 결국 제작 거부를 선동하고 정부의 언론 정책에 항거했다고 ‘제작거부 수괴, 국시 부정’으로 낙인 찍어 해직된거야.

그때는 해직도 급수가 있었어. 나는 A급이었지. 당시 A급은 전 언론사를 통틀어 나를 포함해 12명이었는데 A급이 되면 어느 곳에서도 취직을 못해. 사회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는거지. 

다행히 나에 대한 소문이 나서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청탁이 오기 시작했어. 그 때 글을 정말 많이 썼어. 근 한달에 1천매를 썼을거야. 아마 <태백산맥>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웃음) 그렇게 4년을 버텼지. ‘볼펜 잡역부’로. 아마도 신동아에서 긴 글을 쓴 게 영향이 있었을 거야. 

당시 나는 전두환이 장기집권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내에게 이랬어. 전두환이 집권하는 동안 나는 취직을 못하니까 저금을 해두라고. 그래서 돈을 모아가며 어렵게 살았고 나중에 복직해서 그 돈으로 큰 집으로 이사를 갔어. 역설적으로 전두환이 날 기자로서 거듭나게 하고 아파트를 늘리는 데 공을 세워준 셈이야(웃음).

최초로 보도한 ‘헬기 총격’,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을 하나하나 만나기 시작했지. 그때 조비오 신부를 비롯한 몇몇 취재원들에게 들은 것이 있었어. 그게 바로 85년 신동아에 내가 최초로 보도한 ‘헬기 총격’이야. 80년에 썼던 기사에 관계자들 취재하며 모은 것을 정리해서 보도했는데 거기에 군인들이 헬기로 총격을 했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쓴 거지.

이건 관계자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기에 팩트고 사실인거야. 그래서 기사화했는데 부장하고 나하고 보안사에 잡혀가서 엄청 두들겨 맞았어. 보안사에서는 ‘이북 방송을 듣고 허위로 쓴 것이다’, ‘군인이 어떻게 국민에게 총을 쏘느냐’고 나를 때리고 위협했고 나는 확인하고 쓴 것이라고 맞섰지.

결국 보안사 요원들에게 고문을 당해서 허리가 나갔고 척추를 두 번이나 수술했어. 지금도 오래 있기가 힘들어. 무엇보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평생을 따라다닌 게 정말 힘들었지. 아내는 지금도 대문과 안방 문을 잠그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만큼 트라우마가 심한 거야.

내가 헬기 총격을 최초로 알렸는데 나에게는 특종상은 커녕 주홍글씨가 찍히고 폭력에 짓밟혔어. 그래도 고문당하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박종철 열사가 결국 고문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87년도에 이한열 열사 이야기로 연재를 세 번 했는데 그 때 동아일보가 점점 우파로 색깔이 변해가는 시점이었어. 결국 논설위원으로 발령내려할 무렵에 한겨레신문으로 튀었지(웃음). 그게 난 민주화의 시대 소명이라고 생각한 거야.

한겨레로 옮기면서 내가 기자들 교육을 시켰어. 거기에 온 친구들이 기자 정신만 있지 기사를 쓸 줄 모르는 거야. 내가 그랬지.  신문은 찌라시,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정확한 객관성과 균형성을 담보해야 영향력이 있다, 그렇게 삼겹살 사주면서 밥상머리, 술상머리 교육을 시켰어(웃음).

그러다 89년에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이 일어난거야. 그때 한겨레에 내가 특종을 냈는데 안기부와 공안 검찰이 ‘왜 알려주지 않았나’라며 불고지죄로 6차례나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지. 난 취재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맞섰어. 

결국 그로 인해 한겨레를 떠났지. 한겨레가 나 때문에 ‘빨갱이’로 낙인찍히지 말고 정론지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표를 낸 거야. 그 후로 지방지 주간지 편집장 하면서 낮은 포복으로 글만 쓰며 지냈어.
 
그때 내가 실망한 것이 표현의 자유를 외쳐도 진보나 보수나 거기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는다는 거야. 진보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나를 보면 ‘골수 빨갱이 아니냐’라며 나를 피하곤 했어. 그렇게 언론에서 소외되고 한국사회에서도 소외감을 느꼈어. 

   
▲ 해남에 있는 윤재걸 시인의 시비

“5.18이야말로 분단의 산물, 통일이 진정한 민주화야”

난 젊은날 오로지 기자 일에 충실했어. 팩트에 살고 팩트에 죽는 게 언론 아니야? 그렇기에 헬기 기총소사 사실도 쓴 것이고. 그렇다면 최소한 윤재걸이 저렇게 주장하는데 정말로 팩트인지, 사실인지 의심도 하고 확인을 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무조건 과격하고 무서운 데가 있다고 고초를 겪게 만들었지. 

현실의 민감한 부분을 특종으로 쓴 기자는 고문당하고 정치에 빌붙은 이들이 이사나 고위직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야. 이번에 사실로 밝혀졌는데 이 사건을 보도하고 숨죽여 지내온 기자가 있었고 그 기자가 어떻게 됐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겨레도 내가 서경원 밀입북 사건으로 곤욕을 치를 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  내가 동아일보를 버리고 간 신문인데 상처로 남은 거야. 빨갱이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내가 나간거지. 요즘 한겨레가 이전만 못하다는 비판이 있는데 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어. 그래도 한겨레는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내가 해직됐던 4년의 시간, 엄청난 시련과 주홍글씨가 나를 단련시켰어. 기자로서 나 자신을 확인한 계기야. 역사의 폭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난 5.18이야말로 분단의 산물이라고 봐. 군인이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에게 총을 쏘는 걸 보면서 통일이 되어야한다는 마음을 먹고 통일주의자가 됐지.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화가 되고, 진정한 인권 보장이 되고, 후손들이 발뻗고 잘 수 있다는 생각을 평생 가지게 한 게 5.18 광주민주화운동 취재야.

“내 시는 통일과 민주화를 향한 소통과 울부짖음”

나는 시를 쓰는데, 단순한 음풍농월을 쓰는 게 아니야. 민족통일에 대한 부르짖음이자 민주화를 향한 메시지야. 서로간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소통의 메시지이자 울부짖음이야... 그 전제를 깔지 않으면 성공할 시는 아니지. 민주 통일에 대한 헌시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친구들은 시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시는 언어의 연금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담긴 사상과 자유의 의미의 소통이야. 팩트에 살고 팩트에 죽는 리얼리스트로서의 시야.

이번에 나온 시집 <유배공화국 해남 유토피아!>도 33년만에 나왔어. 난 이 책이 판금될 줄 알았거든. 십여 년만에 쓴 시를 이제 발표할 수 있어. 전 광주 언론이 기사를 다 써주데. 어떻게 보면 내가 촛불집회의 최대 수혜자가 아닐까(웃음).

유배공화국 해남 유토피아!

   
▲ 시비 제막식에 참석한 윤재걸 시인

해남 강진은 전통적인 유배지인데 한양에서 천리 길이야. 그보다 더 먼 곳이 고산 할아버지가 유배됐던 함경도 경원인데 거긴 한양에서 이천 리지.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멀리 떨어뜨리는 것이 큰 형벌인데 그나마 적은 죄를 저지른 이가 해남·강진, 중죄는 함경도 경원이나 제주도였어. 추사 김정희가 간 곳 말이야.

그런데 그 해남 강진이 고유한 문화가 그래서 살아있어. 고산이 계셨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셨고, 그리고 해남은 특히 시인의 마을이야. 김남주가 나왔고, 고정희가 나왔고, 김준태가 나왔어. 

고산 선생은 정말 진보주의자야. 한글을 ‘언문’이라고 천대하고 사농공상이 뚜렷했던 시대에 고산은 양반임에도 한글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을 쓰고 중인이 해야 하는 의학도 했어. 그분은 양반이 자기 글을 안 읽어도 좋다 이거야. 한글로 쓴다는 건 소통을 하겠다는 의미지.

그분은 조선시대 최고의 ‘직사’로 불렸어.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신하라는 거지. 함경도로 유배된 것도 성균관 유생에 불과한 고산이 광해군에게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이이첨을 내쫓으라고 직언했다가 그리 되신거야. 효종 임금의 스승이었고 직언을 하기에 효종이 항상 가까이 두고 싶어했지. 집도 지어줄 정도로. 어떻게 보면 고산 할아버지의 DNA가 내게 고스란이 온 거야.

유토피아는 희망사항이지. 이 청정지역에 고산과 다산,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로 이어지는 올곧은 문필가가 있는 축복받은 땅이야. 이렇게 먼저 깨어난 해남이야말로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지. ‘희망의 출발 땅끝’ 좋잖아! 유배가 과거라면 유토피아는 미래를 지향하는 거야. 새로운 인식의 첫 출발점이라고! 

봄이 온다!

                         
                               윤재걸


얼어붙은 겨울하늘 밑에서 
지새운 수많은 세월들,

때로는 성난 목소리의
민낯 확성기로 

때로는 화장기 서린 
외교적 제스처로 

민낯과 화장의 
두 얼굴로 부단히  

함께 부딪치며 살아온 
한 지붕 두 가족!  

서로가 맨가슴 숨기며, 
서로가 가면 쓴 얼굴로 으스대며

가슴속에 품은 민족애(民族愛)를 
나름대로 과시하며 살아온 나날들!      

( 2018년 신년초 
 반도의 겨울하늘 녹이는 
 따스한 훈풍의 봄바람이 
 북쪽에서부터 불어왔다.
 미움과 시랑의 절대값은 같다는 
 어느 작가의 명언이 확인되는 날이었다.
 한 강대국의 속국으로서 
 자존심 상하던 지난 긴긴 세월,
 단호히 딛고 일어서서 
 두 주체는 외쳤다.
 우리는 하나다고! ) 

우리는 하나다는 말속에 담긴 
평창올림픽이 세계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들은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는 어떻게 쟁취돼야 하는지를 

평화의 평창을 지나면서, 
두 주체는 동시에 외쳤다!   

수퍼권력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겨울은 극복의 계절임도 함께 깨달았다!

미투와 똑같은 논리로 
갑질 일변도의 세계권력을 극복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보다 급선무임도 깨달았다.

통일의 봄은 1178반도의 앞개울에 
이미 와 있다는 사실도.

왜 우리는 오는 봄을 앞장서 
두 손 들어 환영하지 못하는가!

강대국의 눈초리가 아직도 무서운가!  
우리는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1178반도의 봄을 가로막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봄은 이미 저만치 와 손짓하는데… 
봄을 가로막는 자가 누구인지를…

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저해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통일의 마중물 - 세기의 평양공연이 
통일의 지름길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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