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서울 지하철에서 거듭나다
[공연리뷰]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서울 지하철에서 거듭나다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18.05.2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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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페라 70주년 기념 2018년 제9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위대한 오페라의 생명력은 놀랍다. 하지만, 이 생명력이 이어져 온 것은 후대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해석과 재발견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762년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올해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장수동 예술감독이 이끄는 서울 오페라앙상블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오는 음악의 신 아폴론과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로, 그가 리라를 치며 노래하면 나무와 바위가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가 뱀에게 물려서 죽자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저승을 찾아간다. 오르페오의 지극한 사랑 - 그리고 음악! - 에 감동한 저승의 왕 플루토와 왕비 페르세포네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단, 그는 에우리디체를 지상으로 데려올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의심하는 순간,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다.

이 오래된 스토리가 21세기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장수동 감독은 대담하게도 서울 지하철 5호선을 무대로 삼았다. 지하철 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은 비탄에 빠져 새벽 지하철 역내를 방황한다. 노숙자 행색을 한 아모르(사랑의 신)가 “저승으로 가면 아내를 구해 올 수 있다”고 그를 설득한다. 이 첫 장면에서 관객들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고리타분한 신화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현실이라고 느끼게 된다. 장수동 감독은 에우리디체의 죽음 장면에 돛단배, 꽃다발, 하얀 레이스의 이미지를 넣어서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오버랩시켰다. 이번 공연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이 설정 때문이었다.

▲한국오페라 70주년 기념 2018년 제9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무대인사 장면.

구모영이 지휘한 카메라타 안티쿠아 서울은 소규모 앙상블인데도 꽉 찬 소리를 들려주었고 빠른 패시지도 명료하게 연주하여 만족스러웠다. 첫날 오르페오를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시종일관 꿋꿋하게 드라마를 이끌어 나가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둘째 날은 메조소프라노 정수연이 출연하여 뛰어난 역량으로 갈채를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마지막 날은 카운터 테너 사성환이 등장했다. 사실 이 날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는데, 사성환은 특히 2막 이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청중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이희성이 지휘한 그란데 오페라 합창단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제한된 예산으로 수준급의 무대를 선사해 준 모든 스탭과 출연자들께 박수를 보낸다.

▲한국오페라 70주년 기념 2018년 제9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무대인사 장면.

오르페오의 이야기는 1607년 몬테베르디가 처음 오페라로 선보인 뒤 수많은 작곡가들이 도전한 매력적인 주제였다. 전설적인 음악 천재가 주인공이니 그에 걸맞는 음악이 등장해야 했고.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이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오르페오가 등장하는 오페라는 17~18세기에 20여 편 나왔고 그 가운데 글루크의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았다. 19세기, 자본주의 향락문화 속에서 오펜바흐는 <지옥의 오르페우스>로 글루크를 풍자하기도 했다.

이 유쾌한 오페레타에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서로 지겨워하는 중산층 부부로 등장한다. 올림포스의 제우스와 저승의 하데스는 에우리디체를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인다.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저승에 간 오르페우스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아서 그녀를 저승으로 돌려보낸다. 지옥에 모인 올림포스의 신들은 ‘지옥의 갤럽’에 맞춰 캉캉춤을 추고 에우리디체도 즐거운 지옥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글루크의 고결한 오페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르페오가 지옥을 찾아오는 대목에서 글루크의 <그대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Che farò senza Euridice) 선율이 은은히 울려퍼지기도 한다.

▲한국오페라 70주년 기념 2018년 제9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장수동 감독은 이 기나긴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이 고전을 이 시대, 이 나라로 가져왔다. 이 공연으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더욱 넉넉한 생명과 의미를 갖게 됐다.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체를 저승에서 데려올 때 두 사람 사이에 심리적 갈등이 일어난다. 오르페오가 뒤를 돌아보지 않자 에우리디체는 “왜 나를 돌아보지 않나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오르페오를 추궁한다. 글루크 특유의 드라마틱한 대목인데, 굳이 흠을 잡자면 이 대목에서 그녀의 동선이 너무 요란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오르페오 뒤에 머물러 있도록 연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장면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일부 대목은 3막으로 된 원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2막으로 조정한 결과로 보인다.

첫 공연에서 미흡했던 대목은 둘째 날 공연에서 상당히 개선됐다고 들었다. 지하철 선로에서 춤을 추는 게 불편해서 고민 끝에 무용을 조금 줄였고, 악보는 빈 초연본인 베렌라이트 판본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리코르디 판본을 일부 넣었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행복한 정령들의 춤>의 중간 부분, 흔히 ‘글루크의 멜로디’라 불리는 아름다운 플루트 솔로가 나오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웠다.

오르페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체는 다시 저승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아모르(사랑의 신)가 에우리디체를 되살려내고 오페라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 설정이 작위적이어서 공감이 안 간다는 관객들이 의외로 많았다. 차라리 비극으로 끝나도록 두는 게 짙은 여운을 남기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글루크의 오페라가 원래 그럴진대 어쩌란 말인가. 글루크의 음악에 손을 대는 게 허용된다는 말일까? 생각건대, 여러 판본이 존재했다는 사실 - 1762년 빈 버전, 1769년 파르마 버전, 1774년 파리 버전 등 - 은 연출의 필요에 따라 음악을 새롭게 편집 · 배치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오페라 70주년 기념 2018년 제9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인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본다. 화려한 피날레 음악은 무심하게 환락을 추구하는 군중을 묘사하는 것으로 하고, 비탄에 빠진 오르페오를 이와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지하철 5호선 플랫폼에서 오르페오가 아모르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죽어가는 걸로 설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 생략된 ‘글루크의 멜로디’는 오르페오의 죽음을 애도하는 무용 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연출한다면 오르페오가 들고 있는 악기는 오카리나 대신 플루트로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개작이 꼭 글루크의 의도와 어긋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글루크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강력한 개성,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다. 당시 관습과 빈 궁정이 ‘해피엔딩’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에우리디체를 하데스에게 돌려보내고, 디오니소스의 여신도들이 오르페오를 갈갈이 찢어 죽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에서)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