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와 21세기의 모더니즘을 아우른 시인, 김경린
20세기와 21세기의 모더니즘을 아우른 시인, 김경린
  • 이은영· 임동현 기자
  • 승인 2018.05.25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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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후반기 시동인,본지<서울문화투데이> 등 공동, 29일 3시 프레스센터서 김경린 탄생100주년 시세계 학술심포지엄 열어
 

탄생 100주년, 지금 다시 김경린을 생각해야하는 이유

1918년은 문학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많이 탄생한 해다. 우선 <병든 서울>, <The Last Train>으로 잘 알려진 서정시인의 대표주자지만 월북을 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오장환이 태어났고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를 집필한 한무숙이 태어났다.

<얄개전>으로 청춘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조흔파가 이 해에 태어났고 황금찬, 박남수 시인도 이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과 교류한, 사회운동가이자 목사였지만 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 해도 이 해다.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김경린(1918~2006)도 이 해에 태어난 시인이다. 김경린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20세기와 21세기의 모더니즘을 아우른 시인'.

그렇다. 그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조국이 해방을 맞아 자유를 찾는 듯 했지만 곧바로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폐허가 된 도시가 다시 살아났지만 어느새 팽창이 되고, 어느 순간 거품이 터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도시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그는 그 시기에 '모더니스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나는 수족관에 온 한 마리의 어족’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등장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는 전쟁으로 인한 살상과 문명 파괴를 경험하며 기존의 관습과 형식을 파괴한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낸다. 이것이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 바로 30년대의 모더니즘이었고 김기림, 최재서, 이상, 정지용 등이 이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게 된다.

30년대 모더니즘은 서정으로 가득찬 기존의 시와 '카프'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문학에 맞서는 새로운 장르로 주목받아왔다. 물론 이제 막 도시화가 시작된 한국에서 '도시의 환멸과 불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딘가 어설펐고 그로 인한 공감대 형성의 부재가 모더니즘의 생명을 길게 이어가지 못한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다양한 장르의 실험이 지속되던 1930년대의 문학계에서 모더니즘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이었다.

▲서울 종로구 소재 삼청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김경린 시인의 시비

김경린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일본 모더니즘계열 문예동인인 'VOU'에 조선인 최초로 가입한다. 시인 임수경은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발표한 <차창>이라는 시에서 이미 그의 모더니즘 성향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나는/수족관에 온/한 마리의 어족//미끄러지는/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안경은 차웁다'가 전문인 이 시에서 자신을 '수족관의 어족'이라고 한 것이 자신이 부자유스런 세계의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김경린은 1939년에서 1940년 3월 이전까지 동인지<맥 후기>에서 활동을 하지만 한글 말살 정책으로 우리말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그의 길을 험난하게 만들었다.

한글말살 정책으로 조선에서는 인쇄를 할 수 없게 된 김경린은 유학길에 동경에서 인쇄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원고를 가지고 간다. 그러나 매일 아침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있어 맡겨 놓았던 원고마저 분실되고 마는 불운을 겪는다.

이후 김경린은 귀국 후 처음으로 1943년에 <국민문학>에 시를 발표하게 되지만, 일제는 모더니즘시는 영ㆍ미 적국 문학이라는 이유로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다른 파 시인들이 김경린이 ‘하이카라(지식층)라는 것을 질투해 ’징용되지 않았다‘ 고발하게 된다. 김경린은 징집영장을 받고, 곤욕을 치뤘지만 당시도 기술자 우대정책이 있어 ‘기술자 수첩’을 보여주고 곧 풀려날 수 있었다.

<신시론>의 등장,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바로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운영하고 있던 시인 박인환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손을 잡고 만든 것이 바로 <신시론>이다. 김경린을 좌장으로 박인환, 김병욱, 김경희, 임호권 등이 만든 <신시론>은 '구시대 시문학과의 절연'을 내세우며 서정성, 낭만성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의 시를 선보이며 2차 모더니즘의 중흥을 이끌기 시작한다.

그리고 뒤늦게 <신시론>에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가 김수영이다. 김수영과 양병식이 합류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2차 모더니즘의 상징같은 책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다.

▲단기4280년 경.<신시론>의 좌장이었던 박인환 시인(좌측)과 김경린 시인(앞줄 우측).

그러나 이 2차 모더니즘은 오래가지 못할 것은 미리 예견됐다. 김경린은 공학도이기에 정치적인 좌우파라는 구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방 후 혼란기에 좌우 갈등에서 시에서는 정치색을 배제하려고 했기때문에 새타이어를 경계해야한다는 것이 김경린의 지론이었다. 김병욱은 일본 유학에서부터 문학의 정치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신영토'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신시론 초기부터 불안정한 동거였다.

여기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김병욱과 김경희는 월북을 했고 박인환은 센티멘털리즘의 세계로 들어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한 김수영은 리얼리스트로 변했다.

태양이
직각으로 벌어지는
서울의 거리는
프라타나스가 하도 푸르러서
나의 심장마저 염색될까 두려운데

외로운
나의 투영을 깔고
질주하는 군용트럭은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비둘기처럼
그물을 헤치며 지나가는
당신은 나의 과거를 아십니까
그리고
나와 나의 친우들의
미래를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김경린,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 일부)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김경린, <국제열차는 타자기처럼> 일부)

▲.유일하게 1권만 남아서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는 16쪽 짜리 <신시론> 1집. 좌장이었던 박인환이 제일 좋아했던 여배우 로렌 바콜의 사진이 표지로 장식돼 있다.

서울거리의 군용트럭,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 그리고 사라져가고 잃어가는 벗들.

북으로 떠나 소식을 알 수 없는 김병욱과 젊은 나이에 술로 결국 세상을 등진 박인환, 자유를 부르짖다가 시내버스에 치여 불귀의 객이 된 김수영. 그렇게 사라져가고 변해가고 그러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다가오는 듯한  대한민국의 한복판에서 모더니즘의 불씨를 이어간 이가 바로 김경린이다.

“오늘 한국의 젊은 시에 김경린이 가장 가깝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김경린을 생각해야할까? 물론 그의 탄생 100주년이기에 당연히 그의 이름을 이야기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기에 왜 그의 시를 읽어야하느냐는 것이다. 그의 시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할 때가 온 것이다.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는 "오늘 한국의 젊은 시에 김경린이 가장 가깝다. 특히 신춘문예 시가 김경린의 시에 가깝다. 그의 시의 사실적이고 산문적인 현실 묘사, 연상의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이미지와 불연속성의 시어의 나열, 그리고 그 밑에 깔려있는 짙은 인간 냄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1966년 휴지기를 가진 뒤 십여년이 지난 1978년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가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 80년대, 시단에는 '해체시'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현실 세계를 반영한 시에서 더 나아가 아예 시어의 격을, 시의 구성을 모조리 흐트러뜨리는 80년대 해체시는 '시는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격이 있어야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과 더불어 당시 다시 국민을 억압하기 시작하는 정치 권력에 대한 반항으로도 비춰졌다. 이런 시각은 김경린이 광복 후 주도했던 2차 모더니즘과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더니즘 시는 종종 '어렵다'라는 지적을 듣기도 하고 이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예도 허다하다. 물론 김경린의 미발표 시나 최근작들을 보면 어려운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모더니즘’이 주는 선입견으로 인해 김경린의 시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계설 김경린 시인 시비보존회 회장은 "평생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일관해 온 김경린 시인은 언어의 기능 발굴, 표현의 다양성, 사고의 이미지 조형, 무의식의 개척 등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을 쌓았지만 시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문단의 모더니즘에 대한 무지"라고 밝히고 있다.

▲구기동 서재에서 생전의 김경린 시인.

‘모니터 속에 숨을 죽이던 수많은 어휘와 수치들에...’

김경린은 2006년까지 생존했다. 그가 살아온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 중 하나가 원고지와 볼펜이 아닌 컴퓨터로, 기계로 시를 쓰는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오직
밤새
모니터 속에 숨을 죽이던
수많은 어휘와 수치들에 속도를 가하며
그 무슨 광채를 찾아야 하는 것은
진정 흐뭇한 일이기도 한데
좀처럼 기대치는 오지 않고
오직 한잔의 커피만으로
위안을 찾아야한다는 것은 진정 슬픈 일
(김경린, <수많은 창을 향하여> 일부)

기계 속에서 광채를 찾아야하는 현실이지만 시인은 그래도 ‘오늘과 내일을 향하는 광채’ 때문에 ‘안개 속을 헤엄치며 수많은 창문을 향하여 장해물 경기처럼 달려야한다’고 말한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모더니스트가 도시인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그렇다. 이제 왜 우리가 지금 김경린을 다시 읽어야하는지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30년대 1차 모더니즘은 부흥을 일으키기에는 토양이 약했다. 이제 막 도시가 만들어질 무렵에 나왔기 때문이다. 광복 후 2차 모더니즘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발전이 있어야할 시기에 전쟁이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모더니즘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해체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바로 김경린이 있었다. 수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이 단명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21세기까지 모더니즘을 이은 이가 바로 김경린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제 김경린을 통해서 진정한 ‘한국의 모더니즘’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80년대, 90년대, 2000년대에 어떻게 울려퍼졌는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모더니스트의 생각은 어떠했는지, 김경린의 시대를 초월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김경린을 지금 이 시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다.

김경린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돼 선생의 시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열려 의미를 더하고 있다. 오는 29일(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 후기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김경린 탄생100주년 시세계 학술심포지엄>이 그 것이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에는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홍승진 박사(서울대)가 발제를. 이계설 시인(현대시 강사)과 맹문재 교수(안양대)의 토론이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 3월 삼청공원에서 열린 김경린 시인 탄생100주년 기념 추모식 탈후반기 시동인들과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부이사장을 비롯 문학계 원로들이 김경린 시인의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행사는 탈후반기 시동인과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대산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고 유족이 후원한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박일중 탈후반기 시동인회장은 “김경린 선생님은 나라가 주권을 잃은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항상  가슴 속에는 본능처럼 ‘詩 ’를 화두로 붙들고,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큰 자취를 남기셨다” 며 “21세기를 향한 포스트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한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역할을 했던 시인에 대한 평가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롭게 재조명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번 행사를 계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경린(金璟麟) 시인 약력


[연보]
1918 함경북도 종성 출생(4월 24일)
1938 경성전기학교 토목과 8회
1939 《조선일보》에 시 「차창(車窓)」외 2편으로 등단
1939 〈맥(脈)후기〉동인에 참여
1940.3~42.11 와세다(早稻田) 대학 고공토목과 입학 및 조기 졸업
1941 일본 모더니즘 동인 「VOU」에서 활동
1941년 3월부터 「장미의 경기」를 비롯하여 작품 다수 발표
1942 일본에서 귀국(1942.11)
1943 중앙청 도시국에 근무하면서 《국민문학》 등에 작품발표 했으나 전쟁에 비협조적인 親 英美의 詩라는 지탄아래 일시 활동 중단
1947 박인환이 중앙청 도시국으로 찾아와 모더니즘 시운동을 함께하자고 제의
1948 〈신시론〉동인 구성, <新詩論> 1집(1948.4.20.) 발간
(김경린, 박인환,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 5인 참여)
1949 신시론 동인지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4.5.) 발간(김경린, 박인환, 임호권, 김수영, 양병식 5인 참여)

1950 「후반기」동인. 1차(1950년 1월) (김경린, 박인환, 조향, 김차영, 이상노, 이한직)이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 피난지에서 이상노와 이한직은 탈퇴하고 이봉래, 김규동이 합류함.
1955 뉴욕 주립대학 단기과정 입학 후 수료
*20세기 모더니즘 창시자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조우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으로 미국 현대시인협회 가입
1957 〈DIAL〉동인 창립, 사화집 『현대의 온도』 발간(김경린, 박태진, 김차영, 김원태, 이철범, 김호, 이활, 이영일, 김정옥 참여)
한국 시인협회 초대 사업간사 역임(회장 없이 간사제도로 출발)
(김경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와 함께 창립)
1969~1979 새로운 시 방향 모색을 위해 작품 활동 중단.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졸업
1985 시집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 발간
1986 한국신시학회 초대회장 선임
1987 시집 『서울은 야생마처럼』 발간
1988 시집 『그 내일에도 당신은 서울의 불새』 발간
1994 에세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발간
시집 『화요일이면 뜨거워지는 그 사람』 발간
2006 작고(3월 30일)
2012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에 김경린 시비(詩碑) 건립

[수상]
1988 제3회 상화시인상 수상
1994 제5회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 예술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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