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한국발레운동의 제창자-한동인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한국발레운동의 제창자-한동인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8.05.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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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얼마 전, 안데르센 원작 <눈의 여왕>을 60분 정도의 발레로 안무하여 어린이날 기념 초청 공연을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잊힌 무용가 한동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1세대 디자이너 노라노 자서전을 읽다가, 한동인 안무<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 역을 맡은 진수방이 노라노의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한동인은 한국 최초의 전문 직업발레단인 서울발레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한동인은 1945년  박용호, 정지수, 진수방과 함께 조선무용건설준비위원회를, 이듬 해인 1946년 6월에는 현대무용부, 발레부, 교육무용부, 이론부, 미술부 등 다섯 개의 부서로 나뉜 조선무용예술협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은 조택원, 각 부 수석위원에 최승희, 정지수, 함귀봉, 현철민, 김정환이, 위원으로는 조익환(서울 여상 재직), 한동인, 진수방이 있었다.

8월 5일 창립공연도 가졌지만 협회는 유명무실해지고 오히려 개인공연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중 한동인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하필 1950년 6월 25일 공연을 올리려던 <인어공주>는 무산되었고, 한동인은 월북인지 납북인지 조차 모호한 채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한동인은 체계 없이 발레를 가르쳤다는 말도 있지만, 의심쩍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동인과 정지수는 일본에 정착한 러시아 무용가 옐례나 파블로바에게 직접 배웠다. 일본 발레사를 살펴보면, 옐례나 파블로바는 정통 황실발레 출신은 아니지만 늘 공연을 올리는 현장 밀착형이자 실천 위주의 무용가였다.

일본 전통무용, 가부키의 관례처럼 3년이면 발표회를 열고 문하생들을 독립시켜 자생하도록 했다고 한다. 옐례나 파블로바가 황실발레 출신이었더라면 그러한 전통을 만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보수적이고 변화를 원치 않는 것으로 유명한 러시아 황실발레이니까. 옐레나의 제자들은 3년을 배우면 독립해서 모두 각자의 길에 나섰다.

한동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클래식 발레 뿐 아니라 <민족의 피> <꿩> <매> <뱀>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어려서 미술과 공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한동인은 직접 의상과 소품을 제작하는 등 남다른 장이 기질과 창조성을 내비쳤다고 한다.

20세기 초 디아길레프의 발레륏스에서 만들어진 작품 <레 실피드> <장미의 정>도 서울발레단의 레파토리였다. 특히 <레 실피드>는안무가 포킨의 발레이론에 따른 추상(abstract)발레의 기원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47년 전주사범학교에 다니던 임성남(초대 국립발레단장)은 전주에서 한동인의 서울발레단 공연을 보고 한동인 문하로 들어갔다. 1950년에 한동인,정지수가 사라지고는 1954년 일본에서 귀국한 조광과 57년 귀국한 임성남의 등장이 있기까지 한국은 그야말로 발레의 불모지였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북으로 간 한동인은 어떤 격동의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한동인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에 정지수가 있는데, 다리가 길고 체격이 좋은 무용가였다. 그는 북의 무용가인 리석예와 결혼하기 위해서 자진 월북했다고 했다.

정지수의 제자이인범은 발레단을 계승, 유지시키려 애쓰다가 결국 필리핀으로 이주하면서 서울발레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한동인, 정지수 그들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2017년 국립국악원이 마련한 북한민족무용세미나에 참가했을 때였다.

북한에서 무용은, 사회주의 건설 시기 3개의 무용단체를 중심으로 초기 형성기를 거쳤다. 최승희 무용연구소가 신무용의 본산이었다. 정지수와 리석예 부부가 주축이 된 국립예술극장 무용단이 발레무용의 토대를 만들었고, 한동인과 나숙희 부부를 중심으로 최가야 무용단 출신이 포진한 인민군 협주단 무용부가 현대무용의 수용을 이끌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한동인의 창작정신을 떠올린다면 북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결코 순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디에서도 알 수 없었던 1950년 이후 한동인을 다시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남북의 평화가 정착되어, 언젠가 한동인이 북에서 만들었던 안무작품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