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8.12.14 금 16:16
   
> 뉴스 > 피플&인터뷰 > 문화인
     
[인터뷰]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 “죽어가는 골동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나의 일”
미래가 가져올 변화와 가치에 관심, “강화도에 작은 박물관 및 미술관 10개 지을 예정”
2018년 06월 01일 (금) 03:29:42 인터뷰·정리/이은영 발행인, 임동현 차장 prees@sctoday.co.kr

“문화를 지킨다는 건 작은 변화를 지키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그 변화의 물꼬를 트는 것 뿐.참고 견디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서울 인사동. 전통의 흔적을 찾으려는 내외국인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이 곳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인사동의 랜드마크가 있다. ‘통인가게’. 통인화랑과 통인옥션갤러리가 있는 6층의 이 곳은 골동품을 판매하고 미술품을 전시하는 곳을 넘어 오페라 등 음악공연을 하는 장소가 됐고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안전보관’ 등 계열사가 만들어지는 요체가 됐다.

   

▲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이 자신의 선친인 김정환 선생의 사진을 집무실 가운데 걸어놓고 선친의 유지를 늘 되새기고 있다. 김정환 선생의 사진 앞에 선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정영신 기자/사진가

선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2대째 통인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완규 주인. 사실 그는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어엿한 통인인터네셔널그룹의 회장이지만 정작 그가 인사동에 내미는 명함의 직함은 ‘주인’이다. 갑작스럽게 선친에게 “네가 이제 통인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듣고 통인가게를 물려받게 된 그는 그때부터 ‘주인’이 되어 힘들어하는 작가들의 아지트를 만들어주고, 해외 바이어들에게 인정받는 국내 골동품을 소개하며 인사동의 브랜드를,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미래의 변화를 더 꿈꾸고 있었고 더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강화도에 들어설 작은 박물관과 미술관,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맞춘 통인가게의 변화 등이 그가 지금 꿈꾸는 것들이다. 70년대 미국 국무장관 부인의 ‘화장실 에피소드’를 통해 인사동에서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실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통인가게의 전신인 ‘통인가구점’ 모습.

우리 공예에 대한 남다른 감식안을 가진 그는 ‘골동’을 통한 우리 공예를 지켜가는 ‘전통주의자’이자, 미래의 변화와 가치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식하고 변화해 가는 ‘미래주의자’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는 인사동의 선술집들을 ‘주인’처럼 드나들며 여전한 ‘주당’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골동과 사람, 술과 책, 요사이 SNS에서 소통까지... 서화까지 하고 있다. 그와 함께 통인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자못 궁금해진다.

인사동을 지켰던, 그리고 지금도 인사동을 지키고 미래에도 있을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이 전하는 인사동의 역사라 할  통인가게의 이야기를 이제 들어보자.

인사동 역사의 중심에 통인가게가 있다. 2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데 통인가게의 역사를 들려달라.

선친께서 고가구를 판매하셨는데 어느 날 나를 갑자기 부르시더니 개인 통장을 주시면서 “네가 이제부터 통인가구점 주인이다”라고 하셨다. 골동품 장사를 할 때 그 당시도 골동품이 잘 안 나온다고 해서 ‘안 나오는 물건 팔아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사나’라고 걱정했는데 ‘골동품은 네가 살 평생동안 나오니 걱정말라’고 하시더라.

지금은 4층만 골동품을 취급하지만 시작할 때는 전체가 골동품이었다. 그리고 내가 물려받고 나서 ‘주인’이라고 칭했다. 명함에도 ‘주인’이라고 새겼다. 외국 바이어들이 정말 우리 골동품을 좋아했는데 ‘세계에서 최고’라는 칭찬을 엄청 많이 했다.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두 번째고 우선은 당신을 먼저 만나야한다’고 말하는 (억만장자인)데이빗 라커펠러(록펠러)는 자신의 소장품 경매에서 ‘한국에서 가장 좋은 통인스토어에서 샀다’는 글을 쓸 정도였다. 그걸 보고 모 매체 기자가 통인시장을 돌아다녔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웃음). 그는 정말 우리 골동품을 좋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골동품을 가져가려면 포장지가 없어 신문지에 싸서 가져가야했다. 미국 바이어에게 우리에겐 포장지가 없다고 했더니 그 바이어가 미군 기지에 널린 게 포장지라고 하더라. 같이 가보니 정말 미국에서 온 포장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포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통인인터네셔널’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객들 중에 부유층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위해 내놓은 것이 ‘포장 이사’였다.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이동이 어렵잖나. 이사는 포장이사 직원들이 짐을 포장을 해서 나르고 주인은 열쇠만 가지고 집에 가는, 그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바로 도입했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 포장이사의 효시가 된 ‘통인익스프레스’였다.

또 입주나 이전이 늦어지는 경우 짐을 보관할 마땅한 방법이 없지 않나. 그래서 그 짐을 보관하면서 ‘통인안전보관’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통인가게를 이용하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일이 생겨나고 회사가 생겨났다.

   
▲인사동의 랜드마크인 통인가게 입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완규 회장. ⓒ정영신 기자/사진가

통인가게를 첫 번째 재증축 하기 전에 ‘화장실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미국 국무장관 부인이 통인을 찾은 적이 있는데 그분이 이곳에 오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다. 재래식이라 사실 난감했다. 여러번 사용하기 어려울 거라 했는데, 급하니 할 수 없이 안내했다. 화장실을 본 부인이 비명을 지르고 경호원들이 오고 난리가 났다. 역시나 재래식 화장실을 보고 놀란 것이다. 부인은 결국 조선호텔까지 가서 자신의 볼일을 봐야 했다. 돌아온 부인이 다행이 호탕하게 웃어 넘기면서 지나갔지만 정말 자존심이 상했고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청결한 화장실이 있는 집을 지어야해서 통인가게를 만들고 인사동에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게 됐다.

통인화랑과 통인갤러리옥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떤 차별화를 두는가.

옛날에는 화가들과 작가들이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집(화랑)으로 다 왔다. 통인화랑은 올해로 41년이 되어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화랑이다. 당시 분청작가인 윤광조 작가의 전시가 통인화랑 첫 전시였다.

통인옥션은 세라믹 부문에서 제일 오래된 화랑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옥션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만이 아니라 전시된 예술품을 산다는 것이 옥션이다. 통인화랑이 공예 부문이라면 통인갤러리는 모던 아트 쪽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

화랑에서 전시하고 팔리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작품을 사준다. 다행히 나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집세를 내지 않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사들인 작품은 모두 진품이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꽤 긴 시간동안 외교사절을 비롯 각 분야의 내로라 하는 분들도 많이 초청해서 사교의 장을 만들어 주기도 하는 ‘통인오페라’를 100회 가까이 열고 있다.

82회 공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동환 테너 등과 함께 하고 있는데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갈라 콘서트다. 통인오페라뿐만 아니라 ‘조선풍류감상’이라고 해서 판소리 공연도 중간중간 열고 있다.

   
▲82회 쩨 '통인오페라'를 열어온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앞줄 왼쪽 세번째)과 외교사절 등, 참석자들이 연주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앞줄 왼쪽 첫번째는 박서보 화백.

강화도에 박물관을 계획하고 있다는데 어떤 박물관이고 언제 개관 예정인지?

미술관과 박물관을 합쳐 10개를 지으려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품들이 많다. 각자 이름도 다르고 장소에 따라 고가구, 백자, 고려청자, 옛날 의상, 서책 등을 보여주려한다. 또 박물관 밑에는 절도 만들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려는게 목적이다. 지금 한 곳이 건축허가가 났다. 급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천천히 지어지는 대로 나머지 일을 하려고 한다.

강화도에 짓겠다고 생각한 것이, 강화도가 고려궁터가 있는 곳이잖나. 이전에 소니 회장과 테너 이동환 등을 불러서 오페라를 했는데 다음날 고려 궁을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보니 조그만 사당과 먼지가 쌓인 마네킹 정도가 전부였다. 엄연히 고려의 궁이 있던 곳인데 왜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전등사 밑을 보니 생선 튀기고 닭 튀기고 음식 파는 곳들만 즐비했다. 강화도를 이렇게 놔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했고 박물관을 강화도에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통인의 골동품을 보여주는 김완규 주인. 깨어진 청자의 사금파리를 보여주고 있다. 보잘 것 없는 것도 우리 조상의 숨결이 묻어나는 하나 하나를 모두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다. ⓒ정영신 기자/사진가

'통인'이라는 근대의 느낌이 물씬나는 잡지도 발행하고 있다

1974년부터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사실 나는 미술 잡지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구독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광고가 들어오기도 어렵지 않나. 잡지를 주면 ‘잘 봤다’ 한 마디로 끝나고(웃음).

그런데 신문에서 공예를 잘 안 실어준다. 공예를 잘 아는 기자가 없다. 난 신문에 공예가 소개되길 바랐는데 인맥있는 기자들이 종종 써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내가 뉴욕에서 화랑을 10년 정도 했을 때는 유수의 언론이 다 다뤘다. 그러나 국내에 오니 역시나 또 잠잠했다. 통인미술에 우리 작가를 소개시켜야한다는 생각으로 잡지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통인가게가 인사동의 중심으로, 작가들의 활동 무대로 사랑받고 있는데 큰 보람을 느끼리라 생각된다.

사실 크게 보람을 느낀 적은 없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내가 왜 공예를 하게 됐는가 생각해보니 재벌처럼 고속도로를 만들거나 빌딩을 지어 돈을 벌 수 없고 생활용품이나 전자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이었잖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미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봤다.

골동품이나 미술품을 파는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미술, 우리 공예의 우수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기타 산업을 견인해 수출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는 손재주가 발달해 있고 손의 감각이 발달되어 있다. 전시회장에 가면 작품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해도 작품을 만지려하는데 그게 손이 발달해서 그런 거다. 손재주를 살린 공예를 발전시켜야 우리가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되살림’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모조품’이다. 나는 가짜를 만들고 파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되살리는 사람이다. 없어진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지금 나의 일이다.

나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장사꾼에 가깝다. 우리 규모에서 사업가라는 말은 정말 거창하다(웃음). 일전에 거상 임상옥이 말한 ‘상인이 아니라 상도를 지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널리 베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을 사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통인의 역사를 설명하는 김완규 주인. ⓒ정영신 기자/사진가

인사동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 후원도 많이 하신걸로 알고 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와 인물이 있다면

우리가 전시한 작가들 중에 돈이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웃음). 가스값이 없어 불을 못 때고 유약이 없어서 도자를 못 굽는다는 것이다. 나도 돈이 없지만 1~2년간 전시해도 팔리지 않는 작품이 있다면 내가 그 작품을 산다. 그래야 작가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지금은 유명작가인) 화가가 새벽에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애나멜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린다’고 울면서 이야기한다. 그 새벽에 그의 집을 가보니 팔레트가 이미 다 말라있었다. 서둘러 그림 몇 장을 받아들고 와서 주변에 팔았는데, 당시 그 그림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때 사갔으면 지금쯤 엄청났을텐데 말이다(웃음).

그리고 생각나는 이가 예용혜 선생과 이동엽 작가다. 이 작가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오래전부터 알던 실력있는 작가였지만 이 작가도 그림을 많이 팔지 못했다. 그러다 60이 넘어서 그림이 팔렸는데 그가 “형님 덕분에 60 넘어서 비로소 목돈을 만지게 됐다”고 나에게 식사를 산 적이 있다. 내가 내야하는데 굳이 그가 내겠다는 것이다.

이후에 이동엽 작가를 비롯한 작가들의 전시를 했는데 중요한 자리에 이동엽 작가가 오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이 작가가 영국 테이트모던에 의뢰를 받았는데 작품 팸플릿을 전송하는데 돈이 들다보니  백원짜리 동전 뿐이 남았다고 한다. 그게 참...(이 말을 하는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인사동에서 점점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좋은 정치도, 제도도 강압적으로 하면 안된다. 역사도 그렇고 문화도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누가 잘한다고 전체가 바뀌지 않는다. 문화는 전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인사동이 지금 가짜가 많고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흐름이다. 이 흐름도 또 변하게 되어 있다. 문화를 지킨다는 건 작은 변화를 지키는 것이지 전체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변화의 물꼬를 트는 것 뿐이다.

그것을 하기 위해 지금 통인가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이를 통한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참고 견디면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장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이 참고 견디는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도 “사회 변화가 클수록 무턱대고 바꾸려하지 말고 참고 견뎌라. 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인생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인간승리”라고 말해준다.

   
▲김완규 주인은 통인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정영신 기자/사진가

앞으로 하고픈 일이 있다면?

솔직히 요즘은 ‘과거에 무엇을 했다’라고 말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변화가 미래의 가치인데 나는 몇십년간 똑같은 일만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기업이나 장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장사꾼은 그 필요를 가지고 만드는 것이다.

통인가게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인에는 늘 골동품이 있어야한다는 선친의 뜻을 받들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갤러리에서 골동품을 하고 있다.

이제 4차산업혁명시대가 다가오고 AI(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나간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에겐 사실 올드하다. 시대에 맞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이를 보여주고 싶다. 변화를 분명 보여줄 것이다.

 

     피플&인터뷰 주요기사
[인터뷰] 대금연주자 이생강 “우리 소리 끝까지 들어보라. 깊이와 맵시가 있다”
[특별인터뷰] 우제길 화백 "영혼이 담긴 작품 한 점 탄생시키는 것이 작가로서의 꿈"
[인터뷰] 김철호 국립극장장 “국립극장의 공공성 강화하겠다”
[특별인터뷰] 강익중 설치미술가 "창작자는 '왜?' 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김형걸 울산경제진흥원장 취임
ⓒ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이 기사를 추천하시면 "오늘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0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공공재' vs '저작권' 故 이매방
'근현대 전통무용 비평담론' 주제 학
[테마기획]작가를 말하다3-도시의 이
양금의 경계를 허무는 공연, 잠비나이
츄 샤오페이 개인전
뚱뚱한 자본가 가족의 '몸개그', 파
인천의 시대정신 표현한 판소리 2인극
'라 보엠'과 함께 Merry Chr
근현대 미술자료 한자리에 <김달진미술
'젊은 보엠', 파리 뒷골목의 비극을
독자가 추천한 한주의 좋은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구독신청하기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742호 | Tel:070)8244-5114 | Fax:02)392-6644
구독료 및 광고/후원 계좌 : 우리은행 1005-401-380923 사과나무미디어그룹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은영
Copyright 2008 서울문화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