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사의 찬미’와 ‘부활의 기쁨’을 노래한 윤심덕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사의 찬미’와 ‘부활의 기쁨’을 노래한 윤심덕
  • 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8.06.1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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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 평론가, 연출가

창작뮤지컬 ‘사의 찬미’(2017)는 윤심덕과 김우진이 등장합니다. 글루미데이(2014)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시작했고,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성악가라는 윤심덕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실제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사의 찬미’라는 곡을 마지막으로 취입을 하고 현해탄에 투신을 했다는 자체가 무척 ‘드라마틱’하지요. 어떤 ‘각본’을 생각게 합니다. 두 사람은 가명을 쓰고 승선을 했지요. 1926년 8월 4일, 실제 관부연락선(덕수환)에 누가 탔으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은 실제론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자살설이 유력하며, 이어서 타살설과 생존설이 나오게 되었지요.

윤심덕에 관한 뮤지컬이 탄생되기 전, 윤심덕을 소재한 한 두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윤심덕’(1969년, 안현철감독, 문희 신성일 주연)과 ‘사의 찬미’(1991년, 김호선 감독, 장미희 임성민 주연)입니다. 두 영화 모두 두 사람이 현해탄에서 물에 뛰어드는 것으로 맺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윤심덕)이 자살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간 당신에 관한 자료를 접하고 접하면서, 추측과 상상을 통해 얻어낸 결론입니다. 윤심덕은 “나는 어딜가든지 밥은 사먹은 사람”이라며 생존적응력을 자랑했지요. 윤심덕의 가족은 그녀가 ‘남자와 같이 매우 활발’하다고 했고, 주변사람들이 침울한 것 조차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얘기합니다.

윤심덕을 그린 영화처럼, 눈물이나 흘리는 청순가련형이 절대 아닙니다. 윤심덕은 재미(자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습니다. ‘지구상 어디에서든지 재미만 있으면 오래 머물겠소이다.’(동아일보, 1926. 8. 5)

당시 윤심덕은 동생(윤성덕)의 미국 유학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각각 자신들의 지적 및 예술적 욕구를 채우고 싶어서 각각 이태리와 독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했죠. 이런상황에서 윤심덕은 당시의 신흥 음반회사인 닛토(日東)레코드와 거액의 계약을 하고, 많은 곡을 녹음하게 되었지요.

돌연 추가된 곡이 ‘사의 찬미’. 아시다시피 ‘다뉴브강의 잔물결(Donau Wellen Walzer)’이라는 이바노비치(Josif Ivanovici)의 곡을 ‘사의 찬미’라고 개사해서 부릅니다. 당시 일본에서 이 노래가 유행해서 개사해서 불렀는데, 누구도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죽음을 예찬하는 가사를 붙이진 않았습니다. 김우진의 가사로 추측되고, 반주는 윤성덕(윤심덕의 동생)입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철저하게 의도된 음반입니다. 모종의 거래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죠. 윤심덕이 현해탄 배위에서 사라졌다는 기사와 함께, 엄청나게 팔립니다. 닛토레코드는 윤심덕 덕분에 유명세를 타고, 거액을 챙기게 되지요. 이런 연유로 닛토의 자객에 의한 배안에서 타살설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박용구(1914 ~ 2016. 4. 6)에 의해서 제기(월간 ‘객석’, 1984년 4월호)되었고, 훗날 음악평론가 강헌도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어두운 밤이라지만, 배안에서 그렇게 성인 두 명이 살해된다는 게 쉬운 일인가요?

분명한 건,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갑자기 추가된 곡인데, 레코드 뒷면에는 어떤 곡이 실렸을까요? 찬송가에 바탕을 둔 ‘부활의 기쁨’입니다. 두 곡은 서로 연결되면서 어떤 삶의 수수께끼와 같이 다가옵니다. 두 사람은 모든 상황을 예측했고, ‘뛰는 놈 위의 나논 놈’이 되어서 당시 선실보이의 도움으로 물에 빠진 것으로 위장할 수 있었죠. 두 사람은 창해(蒼海)에 빠진 게 아니라, 이후 상해를 거쳐서 유럽으로 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훗날 두 사람이 이태리 로마에서 잡화상을 한다는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동아일보, 1931. 10. 8)  일찍이 개화된 당신 두 사람이 각각의 성을 따서 ‘KYDO(金尹堂)'라는 가게를 차려서 은둔하면서 삶을 즐기며 살았을 것으로, 나는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윤심덕은 조선총독부의 유학생으로 동경 우에노음악학교에서 클래식 소프라노를 교육받은 후, 조선으로 돌아와 레코드가수(유행가수)의 길을 걸었습니다. 윤심덕! 당신은 일찍이 조선사회의 여성에게 부여되는 정조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고, 이런 윤심덕에 일부남성은 부정마녀(不貞魔女)라고 욕을 해댔습니다.

윤심덕은 배우의 길을 병행합니다. 이런 선택의 배후에 김우진이 있습니다. 당시 윤심덕에겐 돈이 절실했습니다. 김우진은 이런저런 이유로 윤심덕의 주변에 ‘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나는 각본을 쓸 터이니, 너는 배우로 나아가라”고 권유를 했고 윤심덕은 토월회의 여배우로 광무대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당시의 여배우를 선택했다는 건,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죠. 두 사람에겐 당시 조선과 일본은 자신들의 꿈을 펼칠 곳은 아니었음을 너무도 잘 알았죠.

윤심덕의 인기는 당시 어떠했을까요? 1921년 7월 29일, 단성사에 열린 동우회(同友會) 연극단 무대에 출연한 윤심덕을 당시 신문에선 “일행 중에서 가장 많은 환영과 갈채를 한 몸에 받은” 윤심덕 양이라 했죠. “윤심덕 양의 독창은 청중의 정신을 다시금 황홀케하였다”로 시작해서, “낮같이 밝은 전등 밑에서 눈빛같은 소복을 입은 양의 붉은 입술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소리”라고 했습니다. 윤심덕의 공연에 관한 긴 기사는 “맑고 애연하게 장내의 공기를 가비얇게 진동하여 청중은 한참동안 취하고 또다시 꿈나라에 방황하게 되었다”고 맺습니다. (동아일보, 1921. 7. 30)

이제 대한민국에선, 윤심덕을 제대로 그린 음악극이 탄생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일본의 레코드산업과 연관되는 ‘정사설’ 혹은 ‘타살설’에 대한 연연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울고 짜고 괜히 심각한 윤심덕은 보고 싶지 않네요. 솔직하고 당당한 ‘강인한 생존력’을 갖춘 조선여성 윤심덕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한편 ‘노래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삶을, 그녀가 남긴 여러 노래와 함께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창작뮤지컬이 만들어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