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화’에서 벗어난 국립현대미술관, 어떤 길을 갈까?
‘법인화’에서 벗어난 국립현대미술관, 어떤 길을 갈까?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8.06.2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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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목소리 높아와, 임기 만료 앞둔 마리관장 ‘혁신안’ 재임 의지 드러내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 26일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 이번 계획 발표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내년이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이라는 점을 감안하고도 올 초 운영 계획을 밝혔던 국립현대미술관이 갑자기 ‘중기 계획’을 발표한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의아함을 가졌다.

그리고 이날 미술관은 정부가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고 법인화 중단에 발맞춰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논의가 시작된 뒤 10년간 도마 위에 올랐던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문제가 정부의 중단 결정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는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논의된 것으로 이른바 ‘미술관의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관 법인화가 곧 ‘정부의 통제’, ‘민영화’를 의미한다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로 인해 법인화를 둘러싼 여러 의견이 10년째 계속 이어져왔다.

한편으로는 법인화 논의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적인 운영을 전제로 진행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8년 관장이 물러난 뒤 두 명의 관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모두 물러났고 관장의 공백 사태, <미인도> 논란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2015년, 바르토메우 마리 현 관장이 부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법인화 논의를 잠재울 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미술관 관계자들은 법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언제 법인화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술관을 살얼음판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살얼음판에서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정상적 운영 먼저’ 제시, 운영방침 바꾼 국현

여기서 잠시 시간을 지난 3월로 돌려보자. 수림문화회관이 주최하고 본지 서울문화투데이가 주관한  '한국 미술계 발전 방안을 위한 포럼-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문제와 4차산업혁명시대 미술계의 방향과 전망을 중심으로'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에 대해 여러 인사들의 의견이 제시됐었다.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가장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은 것은 ‘법인화 이전에 미술관의 정상적인 운영이 먼저’라는 것이었다. 

하계훈 미술평론가는 “내년이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50주년인데 50년을 운영해도 운영 원칙이 달라진 것이 없다. 소장품 관리, 운영 규정 등을 살펴봐도 개선된 것이 거의 없다. 행정 위주, 관료주의적 행정의 프로세스를 바꾸어야한다. 행정 조직이 비대해지고 오히려 학예 조직은 더 작아지고 비정규직으로 이뤄지면서 행정공무원들이 학예사들에게 ‘우리가 못하는 것 하라’ 식으로 일을 하고  관장 없이도 출퇴근 잘하고 도둑만 안 맞으면 된다는 식으로 될 지도 모를 일”이라고 지적했다.

포럼에서는 소장품 구입과 수집, 자체 기획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의 강화를 제안했고, 현 문체부 소속 공무원 중 재무 및 홍보 마케팅 부문을 전문 경영인으로 교체해 이들이 기부금 확보, 홍보 마케팅 및 수익사업을 전담하고, 학예실은 전문 연구기관으로 미술관 소장품 및 전시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에 기초한 기획을 생산해야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또 전문가 출신의 경영 능력을 가진 인물을 관장으로 학예-행정-홍보 마케팅의 트라이앵글로 업무 분장을 하자는 의견이 제기됐고 ‘법인화는 지금 시기에 다시 논의해야한다’, ‘법인화는 세계적인 추세’라는 의견도 포럼에서 등장했다.

▲ 지난 3월 본지 주관으로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포럼

다시 현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국립현대미술관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살펴보면 ‘전문성 강화’를 위해 중장기적 연구와 조사에 기반한 전시기획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개방성 확대’를 위해 연구, 출판, 전시, 소장 등 주요 학예업무에 관내 학예직의 역량을 신장하고 외부 전문가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며 ‘공공성 제고’를 위해 지역 공사립 미술관과의 협력망 사업을 강화해 국가대표 미술관으로서의 공공성을 향상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연구-수집-전시-출판’의 선순환 시스템으로 3~5년 앞서 전시 기획을 수립하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하고 심도 있는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전시 수를 줄이기로 했으며, 학예 분야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조사 연구 활동을 기반으로 한 전시 프로그램 실행과 전시와의 연계성을 강화한 소장품 수집, 교육, 출판 등을 추진한다는 것이 계획의 요지다.

과천관의 2,3층을 근현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소장품전 전용공간으로 조성하는 점, 소장품 수집 관련 규정 개정을 추진하고 가치평가위원회에 외부 전문가를 포함시키는 점, 전시 개막일에 맞춰 시의적절하게 출판물을 보급하기로 한 점,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미술관교육 및 문화접근성 향상 프로그램 강화 등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법인화 논의 중단, 이에 맞춘 중기 운영혁신 계획. 국립현대미술관은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립현대미술관의 순항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 문제가 지나니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런 계획 발표, ‘연임 프로젝트’라는 의심

중기 계획이 발표될 무렵, 일부에서는 ‘왜 지금?’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바로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의 임기가 6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기가 만료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획을 발표하는 것을 두고 이번 계획이 마리 관장의 ‘연임 프로젝트’가 아닌가라는 의심의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마리 관장은 “이번 계획은 법인화 검토 중단 이후 미술관을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할지를 밝혀달라는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연임이나 법인화와는 무관하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해서 계획 없이 물러난다면 미술관의 정체성을 벗어나는 일”이라고 밝혔고 박위진 기획운영단장은 “이번 기획안은 법인화 논의 중단 결정 이후 쇄신안을 내놓으라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요청이 있었고 그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이날 발표에서 마리 관장은 “후임이 오더라도...”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올해 초 ‘2018 전시 라인업’ 발표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마리 관장은 “시도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엔 3년이란 시간은 짧다. 장기적으로 운영해야하기에 한국에서 두 번째 발걸음을 하고 싶다”고 했고, 기자들에게도 “내년에도 이 자리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할 정도로 연임을 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보였다.

하지만 반 년이 지난 후 발표장에서 마리 관장은 후임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이미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마리 관장이 연임을 할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마리 관장이 12월까지 임기를 채우고 후임이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이 더 우세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중기 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하는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

마리 관장은 “이 계획이 후임 관장의 자율적인 선택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임이 오면 바뀌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번 계획의 방향성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방향성 존중’이라는 말에 중기 계획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는 그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후임 관장이 잘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우려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미술관 관계자는 “관장이 바뀌면 결국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되어 있다”는 말을 전했다. 

만약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거나 혹은 ‘전임의 계획’이라는 이유로 취소 혹은 수정이 가해질 경우 자칫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화를 이유로 또다시 ‘법인화’가 거론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미 정부가 법인화 철회로 기운 상황에서 이런 우려가 기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전히 법인화를 찬성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다시 거론될 여지는 남아있다. 그렇게 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또다시 살얼음판에서 제자리걸음을 해야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잃어버린 3년” VS “전시 업그레이드 시킨 공로 인정”

한 매체에 따르면 미술전문가 18명 중 9명이 마리 관장의 연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어 우리 미술사와의 맥락을 찾아볼 수가 없다”, “최순실과 연루됐던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이 공모 결과를 무산시키면서 꺼낸 카드”라면서 마리 관장의 재임 기간을 ‘잃어버린 3년’이라고까지 평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관장이 ‘아시아 네트워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해외 네트워크의 기틀을마련하고 설치미술,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며 전시의 폭을 넓혔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한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공로를 인정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더불어 이번 중기 계획을 통해 마리 관장이 그동안 우리 미술인들이 제시하지 못했던 ‘빅 픽쳐’를 보여주고 국립현대미술관의 변화를 꾀한 점을 인정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미술관장에게 3년의 임기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계획하고 준비하기에도 벅찬 시간인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일을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런 식으로 자꾸자꾸 바뀌는 상황이니 지속적인 발전을 한다는 게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후임 문제 등으로 또다시 파벌의 목소리가 커질 우려가 있다. 마리 관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면에는 자신 쪽에 있는 인물이 관장을 맡아야한다는 저의가 깔려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래저래 국립현대미술관의 길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 불투명함이 계속될 경우 법인화 논의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실패한 시도로 여겨지고 있는 법인화를 다시 꺼낼 가능성은 이제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다. 대한민국 대표 미술관이 그동안 ‘갈지자 행보’를 걸었다고는 하지만 중기 계획까지 발표한 상황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동안의 ‘갈지자 행보’에 대한 비난은 저절로 수그러질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제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될까? 계속 지켜볼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