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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비누로 만든 굳어버린 시간, 소멸의 아름다움
2018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시리즈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2018년 07월 09일 (월) 11:33:48 김수련 인턴기자 press@sctoday.co.kr

장마철이다. 마로니에 공원 한 편에 조각상들이 놓여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장마가 가져 온 비와 바람을 맞고 조각상들이 점점 녹고 있다. 자신의 작품이 닳아 없어지는 걸 원하는 작가가 있을까. 작가 신미경의 작업은 닳고 변형되는 데서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진다. 비와 바람, 관객들의 손길, 부식과 풍화는 신미경 작가에게 반가운 존재들이다.

   
▲ 5일 기자간담회, 아르코미술관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미술관은 온통 비누로 가득하다. 전시장 바깥에서부터 비누 향기가 아른거린다. 미술관 전체를 에워싼 비누는 작가 신미경의 주된 무기다.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2018 중진작가 시리즈로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 개막했다. 그간 작업과 함께 신작과 미발표작을 선보이는 전시다.

조각이라면 보통 견고하고 단단한 대리석이나 청동을 사용해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비누는 사실 통상적인 미술 재료라고 하기보다 일상 용품에 가깝다. 대리석이나 청동과 대조적으로 물과 열, 외부 작용에 굉장히 약한 재료다. 하지만 신미경 조각가는 이러한 비누의 ‘소멸성’을 주목했다.

비누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익숙하게 경험토록 하는 재료다. 시간이 지나고 쓰면 쓸수록, 일그러지고 닳아 거품으로 변해 사라져버린다. 대표작 ‘풍화프로젝트’와 ‘화장실프로젝트’가 소멸되고 마모되는 과정을 전면적으로 보여준다면, 그 외의 작품들은 ‘시간성’에 대해 은유적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 건축프로젝트 <폐허풍경>, 비누, 가변크기, 2018

‘시간성’과 ‘번역’은 작가의 작품세계 속 커다란 줄기 역할을 한다. 작가는 유물화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로 선보이는 신작 ‘폐허풍경’이 그렇다. 비누로 만든 기둥과 벽돌로 만든 건축물은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탐구한 고민의 결과다. 실제로 비누 덩어리들을 녹여 다시 구축해낸 오브제라고 한다.

건축구조물 속 곳곳에 배치된 작은 오브제들은 그동안 해왔던 작업에서 발생한 유물과 같은 파편들을 모은 것이다. 그 개별적인 작업물들이 ‘존재와 소멸’, ‘시간’, ‘유물과 폐허’라는 하나의 큰 주제 안에서 유기적으로 관여한다.

작가는 유물이라는 것이 누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남겨진 것과 사라진 것. 둘 사이 경계와 접점을 드러내면서, ‘폐허풍경’ 건축프로젝트는 전체적인 전시 주제를 관통한다.

   
▲ <화석화된 시간:브론즈>, 비누, 메탈파우더, 2018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역시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업이다. 찌그러진 비누 도자기들을 모아서 순 은박이나 동박을 씌워 부식되는 과정을 거쳐 부식되거나 산화된 도자기처럼 보이게 만든 작업이다. 액체처럼 흐르는 시간을 고체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화석화된 시간’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먹어버린' 결과물이다.

   
▲ <번역시리즈>, 비누, 바니시, 피그먼트, 2013

그동안 신미경 작가는 비누를 이용해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을 비롯해 아시아의 도자기 및 불상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생산물을 재현해왔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을 ‘번역’이라고 부른다. 2000년 초부터 진행한 ‘번역시리즈’를 이번 전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작가에게 번역은 서로 다른 문화 간 인식에서 비롯되는 해석과 차이, 나아가 작업이 놓이는 공간적 맥락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번역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국과 영국을 주 무대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 작가는 다양한 문화적 해석의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몸소 체험했을 테다.

작가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늘 100%를 완전히 전달할 수 없듯이, 문화적 생산물을 나의 방식으로 번역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 <화장실프로젝트>, 비누, 2013

신미경 작가 전시의 가장 큰 주안점은 작가가 ‘최종 결과물’로서 작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작업의 시작을 제안하고, 그것이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시간과 공간에 맡긴다. 그 속에 비와 바람, 공기와 같은 자연과 관객의 손길이 있다.

작가의 대표작 ‘화장실프로젝트’와 ‘풍화프로젝트’는 이번 전시에서도 함께 진행된다. 화장실에 가면 세면대 옆에 작품이 비누 대용으로 비치되어있다. 관람객들은 물 묻은 손으로 마음껏 쓰고 만질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외 전시에서 진행됐던 화장실 프로젝트의 결과물들도 전시장의 한 벽을 차지한다.

작품들은 백이면 백 모두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각 조각마다 눈 부분이 움푹 패여 있거나 코가 꺼져 있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작품들은 그 때 그 시간과 환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번 전시 이후 작가의 품으로 돌아갈 작품들은 또 어떻게 변화해있을까. 전시 종료 즈음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져있을지 다시 미술관에 들러야겠다. 전시 제목 그대로 작업들은 기어코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 서있다. 

전시는 9월 9일까지 아르코미술관 1,2전시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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