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배정혜의 ‘신 전통춤 Ⅳ’ 공연 4일
[이근수의 무용평론] 배정혜의 ‘신 전통춤 Ⅳ’ 공연 4일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7.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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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무용가 배정혜의 춤 경력은 엽기적이다. 다섯 살에 춤을 배우기 시작한 후 10살 때 전국무용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고 11살에는 ‘제1회 천재소녀 배숙자(개명 전 이름)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장추화, 김백봉, 조광을 사사한 그녀는 선화예고 무용부장으로 있으면서 1984년엔 리을무용단을 창단했다. 국립국악원 상임안무가(1986~1988)와 서울시립무용단장(1989~1998)을 거친 후 국립무용단장을 두 차례(2000, 2006) 역임했다.

‘타고남은 재’(1977), ‘대화’(1984), ‘떠도는 혼’(1990), ‘두레’(1993), ‘소울∙해바라기’(2009) 등 수많은 대작을 남기며 올해 74세를 맞은 배정혜를 빼고 한국의 춤 역사를 논하기 어려울 듯하다.

2015년 시작되어 4년째를 맞는 ‘배정혜의 신전통춤 Ⅳ’(2018,6,30~7.3,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공연이 끊임없이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일 것이다. 첫 날을 뺀 나머지 사흘간 나는 객석을 지켰다. 

4일 동안 매 공연마다 8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매일 한 편 씩 소개된 전통춤 4편(강선영류 태평무, 이매방류 살풀이, 배명균류 혼령, 궁중정재 춘앵무)을 제외한 대부분 작품은 배정혜 안무작이다. 제자들로 짜인 출연자들이 매회 100분에 걸친 공연시간을 채웠다.

‘신 전통춤’을 배정혜는 ‘전통 한국무용에 바탕을 둔 배정혜 판 컨템퍼러리 한국 춤’이라고 정의한다. 전통 춤사위를 변용(variation)한 창작품이거나 전통춤의 이름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춤이거나 그가 말하는 신 전통춤 범주에 포함된다.

‘율곡’, ‘사랑가’, ‘아리랑’, ‘우물가에서’, ‘영무’, ‘화엄승무’ 등이 전자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입춤’, ‘부채현금’, ‘풍고’, ‘심살풀이’, ‘연산조’, ‘풍류장고’ 등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날 첫 작품인 ‘율곡’은 수건 살풀이의 변형이다. 무대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장혜림은 수건 대신 나뭇가지를 들었다. 치렁치렁 바닥에 끌리는 폭 넓은 치마와 윗옷이 모두 진한 초록색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옛시조가락에 맞춰 무대를 전후좌우로 누비는 춤은 움직이는 듯 정지해 있고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

말 그대로 정중동이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날아오르는 새처럼 자유스러운 춤사위에서 살풀이의 정조(情調)보다는 생명의 진동이 느껴지는 세련미 넘치는 춤이었다.

마지막 날 소개된 장혜림의 ‘사랑가’는 판소리 춘향가가 배경음악이다. 연두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받쳐 입고 춤추는 춘향의 자태가 요염하다. 흰 창호지를 바른 두 쪽 장지문이 닫혀있는 방안에는 옷걸이에 푸른 색 도포가 걸려 있다.

낭군의 옷을 목 뒤에 두르고 부끄러운 듯 배어있는 체취를 맡으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율곡에서 보여준 고요한 모습과는 달리 사랑에 빠진 여인의 발랄하고 감성적인 춤사위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흥푸리’는 살풀이와 달리 흥겨운 춤가락이다. 셋째 날과 마지막 날, 곽시내와 김현미가 각각 춤추었다. 민요풍 가락들이 이어지면서 맨 손에 버선발로 무대를 누비는 여인의 흥을 신명나게 풀어낸 코믹한 춤이었다.

마지막 날 홍정아가  춘 ‘영무(靈舞)'는 교태가 넘친다. 오색 족두리, 노랑저고리, 붉은 속치마, 청색 치마로 치장하고 흰색 큰 부채를 손에 든 무녀의 옷차림은 오방색 자체가 한 장의 그림이 되고 춤은 한 편의 시가 되어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나흘간 공연의 피날레는 김수현이 춘 ’화엄승무‘다. 흰 색 장삼 가득이 화엄경 경전이 먹으로 쓰여 있다. 화엄경을 독송하는 염불소리가 들려오고 무대 뒤쪽에선 악사가 철금을 연주한다. 김수현은 흰 장삼 안에 검은 승복을 입었고 머리엔 검정색과 흰색의 고깔을 2중으로 얹었다.

장삼 속 두 손에 쥔 죽비가 마주치며 절간의 고요함을 깨치고 맨발의 비구니스님은 득도의 길을 물으며 무대를 휘젓는다. 장삼을 벗고 죽비를 바닥에 내려놓은 스님이 두 손을 모은다. 기나긴 구도의 길은 끝났다. 얼굴엔 미소가 떠오르고 그 미소와 함께 배정혜의 ’신 전통춤 Ⅳ‘ 무대도 막을 내린다. 

사흘간 객석을 지키며 동일한 작품을 나누어 추거나 독무와 2인무 혹은 군무로 보여주는 것에서 출연자들의 고른 기량을 볼 수 있었다. 장승헌이 배정혜와 나란히 앉아 토크형식으로 이끌어간 진행도 무리가 없었다.

질문과 답변 내용이 매회 똑 같았다는 것과 배정혜가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쉬웠다. 군무 중에 실수한 출연자를 현장에서 지적한 것은 일반 공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춤 가운데 살아남아 미래 한국의 전통춤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춤이 있기를 바란다.

최승희-김백봉-배정혜로 이어지는 신무용(혹은 창작무용)의 전통이 어디로 이어질지, 내년의 ‘신 전통춤 Ⅴ’공연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