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전미숙의 ‘Talk to Igor’와 김남진의 'S'
[이근수의 무용평론] 전미숙의 ‘Talk to Igor’와 김남진의 'S'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8.08.1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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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명예교수

연일 최고기온을 갱신하는 찜통더위 중에도 공연을 보러가는 이유는 공연장이 시원하기 때문은 아니다.

예술가의 창조성이 빚어낸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이 능히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전미숙 작품 <Talk to Igor>(7.14~15, 아르코 대극장)와 김남진의 작품 'S'(7.22, 아르코 대극장)를 보았다.
   
<Talk to Igor>는 전미숙이 작년 9월의 신작 ‘BOW'에 이어 10개월 만에 내놓은 것으로 2012년 초연작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1923년 발표한 ’결혼(Les Noces)‘이란 곡을 소재로 하면서 ’결혼, 그에게 말하다‘란 부제를 붙였다. “삶에 대한 감사와 덜어냄의 미학을 절실히 느끼며 모자라지만 비워내면서 세상에 내어놓는” 겸손한 고백을 담았던 ’BOW‘ 이후 전미숙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은 채 객석에서 무대로 등장하는 장면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무대 위에서 아기를 눕히고 칭얼대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젊은 엄마는 꿈 많았던 결혼식 장면을 회상한다. 하얀 웨딩드레스의 신랑신부가 등을 보이고 서 있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출발선상에 선 그들이 걸어갈 길을 암시하듯 앞에 레인이 그어져 있다. 청색의 조명과 백색 웨딩드레스의 대비로 만들어지는 긴장된 무대가 결혼에 대한 차가운 느낌을 예고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원곡은 소프라노 등 여성독창과 남녀혼성합창으로 구성되는 보컬과 무대 주변에 배치된 여러 대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타악기 연주가 고음으로 연속되는 칸타타(Cantata)형식이다. 러시아 농촌의 전통적인 혼례를 소재로 작곡한 음악을 디아길레프의 발레루스가 니진스카 안무로 초연한 전통발레작품이다. 결혼에 대한 축복, 결혼을 앞둔 어린 신부의 불안함, 신부와 신랑 집의 묘사, 경험자가 들려주는 결혼생활의 지혜와 교훈 등이 보컬의 주 내용을 구성한다.

원곡의 가사와 의미를 전미숙은 노래가 아닌 대사로 바꾸고 현대사회의 변화된 결혼관으로 전통적인 러시아 혼례의식을 대체한다. 마이크를 든 젊은이들은 결혼이 통과의례인가,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질문하고 구체적인 조건을 열거하기도 하고, 결혼을 앞둔 장밋빛 환상과 실제의 생활이 주는 좌절 등을 비교한다. 구술되는 내용을 설명하듯 마이크주변에선 다양한 포즈들이 나열된다. 창작자가 ‘결혼’이란 곡을 선택하고 ‘Talk to Igor'란 제목을 붙이면서 원곡의 의미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토해내는 대사가 초연당시엔 신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용공연의 중심언어는 말이 아니라 춤이다. 춤보다 대사가 중심이 되는 무용공연은 여전히 낯선 느낌이었다.

댄스시어터 창의 김남진이 안무한 'S'엔 ‘그 말 못한 이야기’란 부제가 붙어 있다. 'S'는  Sexual, Skinship, S-line 등 성적욕망을 나타내는 단어의 이니셜이다. 미투(me too) 현상을 소재로 한 ‘RED'(15분)와 위안부문제를 다룬 ’또 다른 봄‘(30분)이 1,2부를 구성한다. ‘RED'의 볼레로 음악과 ’또 다른 봄‘의 음악(봄의 제전)은 각각의 작품에 어울리는 선곡이다. 흑백으로 대비된 ‘RED'의 의상과 위안부 여성을 검정색으로 통일한 곽세영의 의상이나 감각적인 부분조명, 무대미술 등은 모두 합격점이다. 주로 부산시립무용단원들로 짜인 군무의 힘도 탄탄하다. 아쉬운 것은 관객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소재를 상식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2부 작품에서 소녀상, 고향의 봄노래, 침상을 뒤덮은 피 등이 그 예다. 남성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이 그를 돌아 전면으로 나서는 1부의 첫 장면과 어두움 가운데 소녀상 하나가 조명되는 2부의 첫 장면으로 이미 'S'의 말 못한 이야기는 모두 말해져 있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식, 새로운 스토리가 없다면 익숙한 소재는 식상한 주제가 되기 쉽다. 김남진이 선택한 두 가지 'S'에는 공통점이 있다. 권력(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이 개입된 비열한 섹스이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라는 것, 남성가해자와 여성피해자란 등식이 성립된다는 점 등이다. 공통적 요소를 갖는 두 가지 ’S‘를 한 작품으로 통합하고 보다 은유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새 작품을 김남진에게 기대하고 싶다..